내 생애 첫 원고청탁

등록 2005.06.17 23:49수정 2005.06.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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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8일 <오마이뉴스>쪽지 함에 한통의 쪽지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님의 글을 잘 읽고 있는 독자 겸 올 6월 창간될 잡지 <천원의 행복>의 편집장입니다. <천원의 행복>은 큰 맘 먹지 않고도 기부하는 행위를 일상화하자라는 취지로, 책 판매 수익금의 50%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작지만 큰 미니 생활 교양지에요. 사소한 일상 속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과 몸을 깊고도 가볍게 하는 내용으로 채울 예정인데, 님의 글을 한 편 받고 싶습니다.

나는 그 쪽지를 읽고 또 읽고 해서 한 스무 번은 읽었을 것이다. 왜? 내 평생 처음으로 받은 원고청탁이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연예편지 대필이나 펜팔 대필은 수없이 했다. 위문편지도 펜팔도 언제나 내게는 답장이 왔기에 친구들은 내게 대필을 부탁했다. 혹여 답장이 오기라도 하면 나는 내가 아닌 친구의 마음이 되어 팔에 쥐가 나도록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글을 써달라는, 이름 하여 정식 원고청탁은 내 마흔둘 인생에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쪽지를 몇 번씩이나 읽다보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쪽지를 보낸 편집장님께서 혹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그것도 창간호에 글을 써달라고 하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우선 편집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수화기 너머로 만나 뵙는 편집장님은 밝고 친절한 목소리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 정중하게 거절을 하기위해 전화를 드렸건만 난 거절의 ‘거’자도 꺼내지 못했다.

"‘천원의 행복’은 기부하는 행위를 일상화하자는 취지로 발간되는 것이며 책 판매 수익금의 50%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편집장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나도 뭔가로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글의 내용이 부족하면 몇 번이고 다시 써보겠다는 전제를 달고는 승낙을 했다.


하지만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이미 거절하지 못한 나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너는 너 자신을 자만하고 있다. 그런 훌륭한 취지를 가지고 발간되는 책에 부족한 네 글이 과연 가당하기나 한가. 분명하게 자신이 없다고 했어야지. 이런 순간엔 그 우유부단함의 노예가 되어선 안 되는 거야. 바보.‘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 뿐, 다시 못하겠다고 전화를 드릴 수는 없었다. 일주일.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뭘 써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즈음. 언제나 나보다 앞서 오일장을 짚어 내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장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늘 그랬듯이 점심 때도 되기 전에 국수를 팔고 있는 간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셔서 잔치국수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다 드셨고 예정된 순서로 고등어를 사고 또 엿장수를 찾으셨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뭔가 스쳤다.

‘아! 그래. 바로 이거야. 따뜻하고도 정겨운 이야기. 아주 먼 옛날을 떠올려 본다는 건 누구에게나 행복한 일일거야.’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간 오일장에서 그 옛날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옛날 할아버지를 어느새 너무나 닮아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다. 항상 가방 속에 준비되어 있는 수첩을 재빠르게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그리고 할아버지를.

집으로 돌아와 장에서 보고 느꼈던 감정들이 행여나 사라질까봐 쏜살같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일장’이라는 제목으로 한편의 글을 완성시켰다. 그 후 몇 번에 걸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천원의 행복’편집부로 글을 보냈다.

a '천원의 행복' 창간호

'천원의 행복' 창간호 ⓒ 김정혜

오늘 오후. 따끈따끈한 ‘천원의 행복’창간호를 우체부아저씨께서 내 손에 들려 주셨다. 책을 받아든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넘겼다.

‘작은 것이라도 제때 나누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조은님의 글을 시작으로 책 구경에 나섰다. 이름이 아주 눈에 익은 여러 유명인사들의 글과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실려 있었다. 드디어 내 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오일장’ 이라는 제목 밑으로 김정혜라는 내 이름이 보였다.

a 첫 원고청탁으로 쓴 '아버지의 오일장'

첫 원고청탁으로 쓴 '아버지의 오일장' ⓒ 김정혜

지금껏 여러 월간지에 내 글이 실린 경험들은 많다. 하지만 이번은 뭔가 모르게 그 느낌이 달랐다. 여느 월간지들은 나 스스로 원고투고를 하고 채택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고 다행이 채택이 되어 책에 글이 실리고 원고료가 입금되면 그저 좋다는, 테스트에 합격한 것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행여 채택이 되지 않았을 때는 한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한참 주눅 들어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참 기뻤다. 그게 난생처음의 원고청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바로 그것이었다. 또 창간호기 때문에 그 첫 걸음마에 나도 동참했다는 것에 대한 보람이 더없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책을 잘 보관하였다가 훗날 내 딸아이에게 주려한다. 단, 그때 내 상황이 지금보다 월등히 나아졌을 때라는 단서를 붙인다.

헛된 꿈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난생 처음 받은 원고청탁을 추억삼아 이야기하며, 더불어 밀려드는 원고청탁에 머리가 지끈거려 행복한 비명에 황홀해하며, 나는 내 딸아이에게 생애 첫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이 엄마의 짜릿하고도 행복했던 그 흥분을 이야기해 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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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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