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93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19 19:33수정 2005.06.1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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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서는 탄환제조소 밖 원두막 같은 경수소(驚搜所:초소) 발치에 서 있었다. 일몰 전이라 아직 위병이 들어오지 않은 막이었다.

"서방님께서 이곳엔 어찌….?"


소홍이 다가가 멀찍이 서서 내외를 하며 물었다.

"예. 학당 문제 때문에…."

"시동생으로서인가요, 부영수로서인가요?"

"둘 다 입니다. 시동생으로서 형수님이 이토록 험한 일에 오래 매달리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부영수로서 형수님 같은 인력이 학당일에 종사해 주시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곳 제조소 일이 험하다고는 하나 다른 아낙들도 다 하고 있는 일이고, 학당일은 저녁에 내려가 보고 있으니 아주 손놓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형수님이 무쇠입니까? 이러시다간 몸을 상하시게 될 것입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홍윤서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높였다고는 하나 저쪽의 제조소까지 들릴 정도는 아니고 어조가 강했을 뿐이다.
소홍이 흠칫했다.


"…."

"죄송합니다. 저는 형수님이…."

"알아요. 서방님의 마음 알아요. 하지만 아직은 제가 조금 더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비해 부쩍 제조소에서 일하는 아낙이 늘었고, 나름대로는 고된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조차 허드렛일은 못 배우고 힘 없는 사람들 차지라는 편견을 갖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다행히도 제가 양반의 규수였고 다른 이들보다 배움의 혜택을 많이 받은 처지가 되었으니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당분간만, 제조소 인력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만이라도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방님은 너무 심려 마시어요."

"그러면 차라리 학당일이라도 다른 이에게 일임하십시오. 그 몸으론 무리입니다."
"걱정 마시래도요.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만 움직일게요."

홍윤서는 심히 걱정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한지 벌써 7년.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이나 광산 학당일에 임하는 형수의 집념은 무서웠다. 홍윤서는 그녀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자기일을 놓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후두둑.
인상을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기어이 빗낱을 던졌다.

"어머나!"

이마와 볼에 닿은 물기에 놀라 소홍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장마인가봐요."

여전히 하늘로 턱을 쳐든 채 소홍이 말했다.

"며칠 비가 오락가락 했습니다만, 아직 장마는 아닐 겝니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소홍의 베옷이 젖기 시작했다. 빗물에 달라붙어 소홍의 어깨선이 약간 드러났다.

"형수님, 여기 안으로 드시지요."

홍윤서가 경수소 아래로 몸을 피하며 소홍에게 권했다.
얼결에 소홍도 경수소 아래로 들었다. 좁은 공간에 소홍이 들자 훈기가 훅 끼쳤다. 그리곤 동백기름 내음인지 창포 내음인지 모를 향이 전해졌다.

잠시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홍이 경수소 밑에서 제조소 쪽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천연의 발을 만들며 시야를 흐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꼴까닥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 뺨 쪽으로 홍윤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형수님…."

"오늘은 떠나는 게 어렵겠지요…?"

홍윤서가 입을 열어 어색한 침묵을 밀어내려는데 소홍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개화군 지원자들 말이예요. 광물을 내간다고 소문을 흘린 날짜가 오늘이고, 아침에 제조소 탄약창에서 꽤 많은 물량이 나가기에 오늘 출발하는 것으로 알았거든요."

"운산 관아에서 아직 포졸들이 당도하지 않아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신병 호송은 병무영의 일인지라 민균이가 관장하고 제겐 보고만 올라올 뿐이라서요. 별반 드릴 말씀이…."

"아낙이 그런 세세한 일을 알아 무엇하겠습니까. 권 영수님이 부재 중이시니 어련히 서방님께서 알아 하시겠지요. 그리고 아신다 한들 제게 미주알 고주알 토설하실 분도 아니고요."

"그런 의도로 말씀을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만…."

"괜찮습니다. 서방님. 저는 그런 서방님의 모습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엔 세 치 혀를 놀려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고, 굳은 입을 통해서도 후련히 들리는 말이 있지요. 서방님의 입술은 굳게 닫혀있으나 저는 다 들을 수 있습니다."

"……"

소홍이 경수소의 기둥을 붙잡고 여전히 제조소 쪽을 응시한 채 말했다. 홍윤서는 또 한번 마른 침을 삼켰다. 자꾸만 목이 말랐다.

"토포군에 쫓겨 이 나라를 떠날 때도, 다시 먼 바다 건너 양이의 나라를 향해 청에서 나설 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서방님의 그 굳게 다문 입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게지요. 두려워 말라고, 내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다 잘 되리라고. 한 순간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도요."

"혀… 형수님…."

"서방님 맘 다 압니다. 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를 때 제 손을 잡아 끄실 때부터 지아비를 잃은 슬픔에 떨던 어깨를 다독여주실 때부터 저는 서방님의 마음을 다 받았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인걸요. 미국을 떠나기 전 기차에 올랐을 때, 그 때 느꼈습니다. 우린 철로 같다고. 단 한 번 헤어져본 적 없으나 어느 때 한 번 합쳐 본 적 없는 저 끝없는 평행선 같다고. 아프지만 그것이 철길의 운명 같아요. 든든히 기차를 나르기 위해선 늘 그만큼의 거리를 지키며 끝없이 뻗어 있어야 하는…."

"그래서… 기차 나르는 일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알아요. 그러지 않으신 건 참 잘 한 일이어요. 조선의 백성을 생각하시어요. 무지몽매한 이 백성들을 그냥 이대로 살게 해서는 아니 되시는 일이어요. 간곡한 청입니다. 부디 든든한 철로가 되어주셔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이 맘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땐 수백 만 조선 백성보다 단 한 사람이 더 크게 가슴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런 말은 마시어요. 그리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소홍이 흐느끼듯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막고는 경수소를 뛰쳐 나갔다. 빗물에 온몸을 적시시며 물의 장막사이로 사라져갔다.

홍윤서는 가만히 경수소 기둥에 머리를 대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빗소리보다 더 크게 가슴의 응어리를 뱉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꼭 감은 채 주먹만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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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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