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순신 아저씨는 어디 있어?"

온가족이 이순신 촬영장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등록 2005.06.20 16:13수정 2005.06.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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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처갓집이 보리를 수확한 후 마지막 모를 심었습니다. 이제서야 농사일이 한숨 돌렸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가까운 데 소풍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아 아내와 딸에게 소풍 장소에 대해 의견을 물었습니다. 아내는 매주 농사일에 힘들었던 저를 생각해서인지 가까운 곳에 가자고 합니다.

오늘 소풍은 '이순신 아저씨' 만나러 부안으로


"세린아, 넌 어디 가고 싶어?"

지난 19일 일요일. 아침부터 소풍 간다는 말에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엊그제 사준 천 원짜리 선글라스를 쓴 채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자기 물건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세린이를 붙잡아 놓고 물어봅니다.

"신나고 재미있는데."

a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북선 앞에 아무 말도 못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광객이 저처럼 같은 생각으로 이곳을 찾을 텐데 좀 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북선 앞에 아무 말도 못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관광객이 저처럼 같은 생각으로 이곳을 찾을 텐데 좀 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 장희용

세린이한테 어디를 갈 거냐고 물어 보는 것 자체가 무리였나 봅니다.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켭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촬영장에 대한 정보가 눈에 띕니다.

"세린아, 이리 와 봐. 우리 이순신 아저씨 보러 갈까? 세린이도 이순신 아저씨 좋아하잖아."
"이순신 아저씨?"
"있잖아. 거북선도 나오고, 너 그 드라마 좋아하잖아."
"칼싸움 하는 아저씨! 그래, 그래. 우리 거기 가자."


김밥 싸랴, 라면 끓여 먹을 채비하랴, 애들 옷 입히랴, 한참을 부산을 떤 후에야 드디어 출발합니다. 줄포 IC를 빠져 나와 한적한 시골 풍경을 보면서 달립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이순신 아저씨 만나러 가는 길이 그리 만만치가 않네요. 간혹 <불멸의 이순신> 촬영 장소에 대한 이정표가 보이긴 했지만 저 같이 길치인 사람한테는 유명 관광지로 부각 시키려는 지자체가 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거북선 등이 있는 '군선 세트장' 이정표가 보입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립니다. 그 순간 밀려오는 실망감. "이게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달랑 작고 초라한 거북선 하나만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영웅, 그리고 그 영웅과 함께 이 나라 조선을 지켜 낸 거북선의 웅장함을 느끼기에 너무 부족합니다.

정말 난감했던 건, 세린이한테 할 말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세린아, 이게 거북선이야. 텔레비전에서 봤지? 나쁜 사람들 다 물리치는 거"하면서 나름대로 역사 소풍을 온 것에 대한 아빠의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보고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동글동글 예쁜 조약돌과 맑은 물, 아이들 놀기에는 천국

'혹시 다른 곳도 여기 같은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건물도 많이 있고, 풍경도 아름다우니 여기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향합니다.

a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바라 본 풍경이 너무 멋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렇지 제 짧은 여행 경험으로 이만한 풍경을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너무 멋집니다.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바라 본 풍경이 너무 멋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렇지 제 짧은 여행 경험으로 이만한 풍경을 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너무 멋집니다. ⓒ 장희용

"와, 진짜 멋지다!"

저 밑으로 펼쳐진 바다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아내와 세린이도 창문을 열고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좀 전의 실망감은 싹 사라지고, 한껏 기대치가 높아집니다.

날씨가 더워서 본영은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일단 바닷가로 향합니다.

a 물이 정말 맑고 깨끗합니다. 동글동글한 예쁜 돌이 깔려 있어 아이들 놀기에도 정말 좋습니다.

물이 정말 맑고 깨끗합니다. 동글동글한 예쁜 돌이 깔려 있어 아이들 놀기에도 정말 좋습니다. ⓒ 장희용

신발을 벗어 던지고 첨벙첨벙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시원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도 깊지 않고, 동글동글한 예쁜 자갈이 깔려 있어 아이들 놀기에도 정말 좋습니다. 여기저기서 '퐁당 퐁당' 돌을 던지고, 물장구를 치고 있네요. 어떤 아이들은 아예 수영을 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들은 동그란 자갈 위에 앉아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a 물이 깊지 않아 이렇게 물장구를 치는 추억도 아이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물이 깊지 않아 이렇게 물장구를 치는 추억도 아이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습니다. ⓒ 장희용

a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퐁당퐁당' 놀이를 하고 있네요. '밥 많이 먹어서 힘이 세다'는 세린이가 자기 딴에는 무겁고 큰 돌을 집어 던지며 동생한테 힘자랑을 합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퐁당퐁당' 놀이를 하고 있네요. '밥 많이 먹어서 힘이 세다'는 세린이가 자기 딴에는 무겁고 큰 돌을 집어 던지며 동생한테 힘자랑을 합니다. ⓒ 장희용

아빠, 이순신 아저씨는 어디 있어?

"세린아, 이제 그만 놀고 이순신 아저씨 보러 가자."

놀고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본영으로 향합니다. 세린이 손을 잡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순신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물론 세린이는 듣는 척도 안하지만요.

그래도 한 가지라도 알려 주고 싶은 아빠의 욕심에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순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줍니다. 세린이가 지루했는지 이야기 도중에 자꾸만 도망치려고 하기에 이번에는 양 손으로 꽉 안고 계속해서 이순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애가 뭐 안다고 괴롭히냐'는 표정으로 저를 봅니다. 자꾸만 도망치려는 딸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해서 갑자기 놀부 심보가 발동해 오기로 더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린이의 한 마디가 저를 멍하게 만드네요.

"아빠, 이순신 아저씨 어딨어?"

아내도 뭔가 고소하다는 듯이 빙긋이 웃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진짜 난감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세린이를 보면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고 해서 얼떨결에 나온 말.

"오늘은 촬영이 없어서 이순신 아저씨 없어."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옹색한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서 열심히 없는 지식 동원해 이순신 아저씨에 대해 설명한 것이 다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a 이순신 아저씨 어디 있느냐는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고 제가 방심하는 사이 제 손을 뿌리치고 저렇게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순신 아저씨 어디 있느냐는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고 제가 방심하는 사이 제 손을 뿌리치고 저렇게 도망치고 있습니다. ⓒ 장희용


a 아빠한테 탈출한 것이 재미있나 봅니다. 뛰어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웃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 같습니다.

아빠한테 탈출한 것이 재미있나 봅니다. 뛰어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웃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 같습니다. ⓒ 장희용

이날 소풍은 길과 거북선, 그리고 아빠의 엉뚱한 대답만 빼고는 정말 재밌고 즐거운 소풍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집에 와서도 이순신 아저씨 어디 있느냐고 자꾸 물어 보는데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하나요?

덧붙이는 글 | 군선세트장은 관련기관이 관심을 좀 더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뿐만 아니라 오신 분들이 대부분 실망을 하고 가더군요.

덧붙이는 글 군선세트장은 관련기관이 관심을 좀 더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뿐만 아니라 오신 분들이 대부분 실망을 하고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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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누군가 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오지 않을 세상입니다. 오마이 뉴스를 통해 아주 작고도 작은 힘이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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