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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감영.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권기범의 두 호위가 동헌 앞 마당에 미동도 없이 서 있고 감영의 나졸들이 속속 당도했다. 포교로 보이는 두엇은 환도를 들고 있었고 대개는 길이가 1장 5척(3m15cm)나 되는 장창을 꼬나 쥐고 있었다. 급했던지 개중엔 관아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한 의장용 무기인 삼지창, 당파를 들고 나선 자도 있었다.
문을 틀어 막고 동헌 마당으로 들어선 자가 십 수 명을 넘어 서고 있었다.
"관찰사 영감! 괜찮으시옵니까?"
윤석우 군관이 소리를 질렀다. 빗소리에 때문인지 안에서는 밖에서 벌어진 소란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윤석우 군관의 소리에 여닫이 방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냐?"
손님과 마주한 관찰사 박규수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곁눈질로 권기범을 훑는 그의 눈에 자신감이 비쳤다. 이 정도 소란까진 원치 않은 것이나 자신의 안마당에서 이토록 당당한 권기범의 위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다행스런 빛이었다.
"영감, 별고 없으십니까? 이 어인 일이옵니까? 이 자들은 대체 누구이옵니까."
윤석우가 물으며 앞으로 다가서자 권기범의 호위 둘이 막았다.
"윤 비장, 괜찮네. 이 손님들이 좀 엉뚱한 면은 있네만 별일은 아니니 돌아들 가게. 그리들 비 맞다간 고뿔들겠어."
권기범에 대한 처리문제로 박규수가 순간 머리를 굴렸으나 나졸들의 무장을 보고는 이내 물러가라는 말로 바꿨다. 비가 내리는 관계로 활이나 화승총을 지니고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대나무 폭약통이나 장전 없이 다섯 발을 내리쏜다는 오혈포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큰 낭패였다. 상대가 셋이라고 깔보았다간 막대한 피를 부를 것이 뻔했다.
"영감, 별 일이 없으시다면 저희 쪽으로 나와 주소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윤석우는 쉬 물러서지 않았다. 역시 예사 눈썰미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박규수가 인질로 잡혀 의중과 다른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감께서 나가셔야 수하의 의심이 풀릴 듯 합니다. 번거럽더라도 일어서시지요."
보다 못한 권기범이 권했다. 만반의 준비는 되어 있지만 일이 귀찮아 지는 것은 피해야 했다.
"허허. 녀석, 성격도 참."
박규수가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신을 신고 권기범의 호위들 사이를 지나 윤석우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가가 잽싸게 뛰어와 우산을 받쳤다. 권기범도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권기범의 호위 둘이 뒷걸음으로 물러나 권기범 옆에 섰다.
"대감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흰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권기범이 점잖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엔 보자기가 들려져 있었다. 발화통이었다.
"누가 곱게 보낸다더냐! 감히 감영과 관장을 능멸하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줄 알았더냐."
윤석우가 칼을 빼들었다. 이제 박규수가 자신의 무리 속으로 넘어왔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칼을 들고 있던 포교들도 험악한 자세로 다가섰다. 그 뒤로 벌써 오라를 손에 쥔 나졸도 있었다.
"허튼 짓 하지마라!"
호위 둘이 품에서 오혈포를 꺼내 들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 오혈포의 뭉툭한 통쇠를 타고 빗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포교들의 환도 끝에서도 빗물이 방울져 맺혔다. 그러나 아무도 오혈포를 쇠곤봉 이상의 흉기로 인식하는 자는 없어 보였다. 다만 안주에서의 총격전을 목도한 윤석우만이 긴장의 빛을 띠었다. 일송은 윤석우의 눈치만 살폈다.
"에에이!"
위협인지 실제 공격인지 의도를 모를 위압적인 자세로 나졸이 달려들었다.
[탕]
빗속에서 하얀 구름을 만들며 터지는 총소리에 모두 얼어붙었다. 달려들던 나졸도 화들짝 놀라 멈칫했다.
[탕]
채 화연이 가시지도 않은 총구에서 다시 총환이 발사되었다. 놀라 멈칫했던 나졸이 이번엔 창을 떨어뜨렸다. 다른 나졸들은 두세 걸음 물러섰다. 누군가는 동헌의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오직 윤석우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빗물에 젖은 총열에서 아직도 김을 피우고 있는 총구는 거의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단순히 위협이었음을, 그러나 이후는 위협이 될 수 없음을 은근히 드러낸 방포였다.
"대감, 그만하시지요."
주위 소란은 안중에도 없는 듯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서있던 권기범이 말했다. 모든 게 계산 속에 있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빙긋 웃으며 왼손에 든 보자기를 슬쩍 들어보였다. 시종 굳은 얼굴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박규수가 입을 열었다.
"윤 비장, 됐다. 그쯤 하거라."
중단에 칼자루를 모으고 정안(正眼)으로 적을 노려보는 자연견적세(自然見賊洗)를 풀지 않고 있는 윤석우는 여전이 미동이 없었다.
"그만하거라. 석우야. 피차 피를 보아서는 아니 될 처지 같구나."
박규수는 윤석우가 대답이 없어 몸이 달았다. 만남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권기범이란 이의 인물됨을 볼 때 여기서 살상을 벌일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진다면 상황은 어떻게 치닫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윤석우는 분명 위압에 눌려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박규수가 아는 윤석우는 그랬다. 더구나 지금 윤석우의 태도가 그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지금 그는 몇 보 앞의 총구를 피해 둘을 단숨에 베는 호흡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장전과정도 없이 연거푸 두 발의 총환을 쏟아낸 저 병기의 틈을 비집고 상대를 제압한다는 게 무리라는 걸 느끼고 있기는 할 터였다.
"냉큼 그 칼을 거두지 못할까!"
박규수가 노성(怒聲)을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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