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안 잡아주면 집 나가버릴껴"

우리동네 최고령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부 사랑

등록 2005.06.22 10:26수정 2005.06.2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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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이른 아침에 아랫집 할아버지가 순찰을 도셨다. 한참 통나무와 막돌을 섞어 황토담장을 쌓고 있는 우리 집 쪽으로 지팡이를 짚고 모퉁이 길을 돌아 올라오시는 게 보였다. 또 뭐라 하실까 기대 반 귀찮음 반으로 못 본 척 일만 하고 있자니 지팡이를 치켜들고 호통을 치셨다.


“어이. 히시기. 지금 뭐 하는겨?”
“예. 이제 담벼락 지붕 얹을려구요.”
“뽄때 있게 혀. 여기는 바람이 쎄게 불어. 담장 지붕을 단다니 해야 혀.”
“네네. 알고 있어요.”

통나무와 황토와 막돌로 짓는 담장
통나무와 황토와 막돌로 짓는 담장전희식
담장 쌓는 막돌이 모자라 트럭을 몰고 동네 어귀로 나가다 보니 할아버지가 할머니랑 밭 귀퉁이에 앉아 티격태격하고 계셨다. 나는 차를 세우고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지금 왜 그러세요?”
“가물어서 깨밭에 물을 줘야는디. 할마이가 줄 좀 잡아 줘야는디 말여. 안 잡아 준다자녀.”

할머니 : 아이구 힘들어. 물 안 줘도 돼야.
할아버지 : 잡고만 있으면 된다니께. 물 줘야 혀.
할머니 : 왜 이리 힘들게 혀어. 물 주지 마.
할아버지 : 다 타버린당게. 내가 다 뿌릴팅게 잡기만 혀어. 쬐끔만 줄팅게.
할머니 : 깨 없어도 돼야.
할아버지 : 그럼. 뭘 먹고 살껴?
할머니 : 무신 걱정이여어. 아들 딸 다 있는데 뭔 걱정이여.
할아버지 : (할머니 등을 토닥토닥하며) 쬐끔만 준당게. 줄 잡아줘 잉?
할머니 : (어깨를 털면서) 시러.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난 암껏도 못혀.
할아버지 : 나보다 아홉 살이나 덜 먹었으면서 뭐가 그리 아프다는 겨?


할아버지 도끼를 벼려 드렸다.
할아버지 도끼를 벼려 드렸다.전희식
이때 내가 끼어들었다.


“에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도 올해 일흔 여섯이잖아요. 그리고 할머니는 열 한 남매나 낳느라고 더 아픈 거예요.”

할아버지는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별 도움이 안 될 놈이다 싶은지 다시 할머니를 꼬드기다가 이제는 협박을 한다.


할아버지 : 줄 안 잡아주면 내가 집 나가버릴껴?
할머니 : 아이고. 나가유. 나가시유.
할아버지 : 내가 집 나가면 어찌 살려고?
할머니 : 아들네 가지 뭐. 무신 걱정이여. 근데 할아버지는 집 나가면 어딜 갈라우?
할아버지 : 내가 아들네 갈 껀디?
할머니 : 저어기. 안산에 사는 큰 아들네 가시우. 나는 익산 작은 아들네 갈팅게.


내가 여기저기서 막돌을 트럭에 주워 담아서 막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데 할아버지가 고무호스 다발을 한 아름 안고 왼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끙끙대며 집을 나오시는 거였다.

“에이. 이 사람 무정한 사람아. 사람이 왜 그 모양이여.”
“네?”
“내가 할마이한티 그러코롬 말 하면 ‘할머니 잠깐이래니께. 줄 잡아 주세요’ 그래야지. 자꾸 웃기만하고 그게 뭐여? 에이. 무정한 사람.”

졸지에 무정한 사람이 된 나는 하하 소리 내어 또 웃었다. 할아버지도 따라 웃었다. 저 멀리에서 할머니가 따라 나오시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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