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개판 5분 전이구만!"

등록 2005.06.22 14:18수정 2005.06.2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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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바깥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나가보니 전형적인 발바리 종인 우리집 바둑이가 새끼를 낳으려고 진통을 하면서도 마땅히 안전한 장소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중이었고, 우리 집 늙은 개 토비가 그 꼴(?)이 보기 딱했는지 우리에게 알리려고 현관 앞에서 그렇게 이상한 소리로 짖어댄 것이었습니다.

두더지를 사냥한 토비
두더지를 사냥한 토비오창경
우리가 나갔을 때는 이미 바둑이의 엉덩이에서 새끼의 상반신이 반쯤 나온 상태였습니다. 이제 겨우 한 살인 바둑이의 첫 출산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토비의 경우, 항상 미리 출산할 장소를 만들어 놓고 자신이 알아서 안전하게 출산을 해온 터라 바둑이도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우리는 바둑이의 출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고통스럽고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한 바둑이는 콩을 삶는 가마솥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더니 잿더미 속에 새끼를 낳고 말았습니다. 재투성이가 된 강아지는 숨을 안 쉬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강아지가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바둑이가 아예 아궁이 속에 보금자리를 잡으면 더 위험할 것 같아서 거처를 마련해서 옮겨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통 중인 바둑이가 주인이 부른다 해서 아궁이 속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집게를 가져와 새끼를 살짝 꺼내서 급하게 마련한 거처로 옮겨 놓은 다음에 바둑이의 출산을 도와줄 작정이었습니다.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토비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토비오창경
그런데 이 거처가 문제였습니다. 하필 한 달 전에 새끼를 낳아서 다 키워놓은 치와와 잡종인 토비의 보금자리에 바둑이 새끼를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단이 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상황은 이랬습니다. 바둑이의 경황없는 출산 소동에 덩달아 뛰어다니던 토비가 어느새 바둑이 새끼가 있는 상자 속으로 뛰어들더니 자기 젖을 물렸습니다. 나머지 새끼를 낳으려고 상자 속으로 들어가던 바둑이는 적반하장으로 토비가 사납게 으르렁대며 바둑이 새끼를 품어버리자 깨갱대며 향나무 아래 풀숲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토비가 진짜 자기 뱃속에서 나온 새끼들을 밀어내며 바둑이 새끼한테만 집착을 한다는 것입니다. 졸지에 보금자리에서 내쫓긴 토비의 진짜 새끼 세 마리까지 낑낑거리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이의 새끼를 빼앗아서 제 새끼인 양 품고 있는 토비
바둑이의 새끼를 빼앗아서 제 새끼인 양 품고 있는 토비오창경
"이거 뭐, 완전히 개판(?) 5분 전이구만."
"5분 전은 무슨… 진짜 개판이구만."

통제가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는 이런 소리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아침을 먹고 나와서 바둑이가 나머지 새끼를 낳은 향나무 아래 풀숲을 살펴보니 바둑이는 강아지 한 마리를 더 낳아서 그간의 소동을 잊은 듯 평화롭게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토비는 토비대로 바둑이 새끼를 자기 새끼인 양 애지중지 품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개털(?)이 된 토비의 새끼들은 기가 죽어서 구석에 엎드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토비에게 새끼를 빼앗기고는 침울한 바둑이
토비에게 새끼를 빼앗기고는 침울한 바둑이오창경
일단 남의 새끼인데도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는 토비에게서 바둑이의 새끼를 빼앗아서 바둑이에게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내가 토비에게서 빼앗은 바둑이 새끼를 안고 향나무 아래로 가는 동안 토비는 나를 따라와서는 하얀 이빨을 세우고 적대감을 드러내더니 갑자기 바둑이 머리를 물어버렸습니다.


얌전한 성격으로 항상 토비에게 밀렸던 바둑이도 이번에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듯이 맹렬하게 토비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내가 막대기를 들고 말리지 않았다면 우리 집 개들의 혈투가 볼 만했을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바둑이 새끼를 그냥 토비에게 키우게 하는 것이 집안의 평화가 유지되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 토비의 이런 전과(?)는 처음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에는 토리라는 잡종견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토비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토비가 며칠 먼저 출산을 해서 새끼를 품고 있었는데 토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토리가 토비의 집에 새끼 한 마리를 낳아 놓았습니다.

졸지에 어미의 사랑을 빼앗긴 토비의 진짜 새끼들
졸지에 어미의 사랑을 빼앗긴 토비의 진짜 새끼들오창경
외출에서 돌아온 토비는 이번처럼 그대로 토리의 새끼까지 품어버렸습니다. 어쩌면 토리는 자기의 운명을 직감한 듯이 출산 후 일주일만에 교통사고로 즉사해 버려서 이런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얼라, 저런 미친×가 또 있나. 가짜 에미 안 볼 때 진짜 에미한테 살짝 갖다줘봐."

결국 우리 집 개판 사건의 솔로몬은 옆집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가 시킨 대로 토비가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바둑이 새끼를 훔쳐다가 바둑이 품으로 돌려보내고는 토비의 눈치를 살펴보았습니다. 토비는 바둑이가 새끼들을 품고 있는 곳에서 좀 떨어져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체념을 한 듯이 돌아서더군요.

결국 이렇게 해서 우리 집 개판 사건은 종결되었답니다.

토비에게서 새끼를 되찾은 바둑이가 진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토비에게서 새끼를 되찾은 바둑이가 진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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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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