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폰도 가고, 도토리도 가고, 포르쉐폰만 남았네~

경품이벤트에서 또 떨어지다

등록 2005.06.22 22:23수정 2005.06.2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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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열 00번!"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에게 2:1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자 마지막 남은 브라질전만큼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보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마침 한 극장 체인과 모통신사가 연계하여 <스타워즈3-시스의 복수>를 본 후 이어 청소년 축구 대표팀 경기를 보고, 마지막에 경품까지 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태워 몸까지 녹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주말이라 전철이 늦게까지 다니지 않아 꽤 많은 택시비를 써야 하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그 이벤트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스타워즈3-시스의 복수>는 재미있게 보았지만, 기대 또 기대를 했던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2:0으로 패하자 들뜬 마음이 싹 가라앉고 말았다. 축구가 지면 늘 허무함이 3~4일 동안 가슴을 채우곤 했지만, 이날은 단 5분만에 새로운 설레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해 허무함을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다.

그건 바로 가장 마지막 행사인 박주영폰 추첨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모 통신회사가 내건 경품은 모 포털사이트 사이버머니 도토리 1000개(10명에게 100개씩)와 박주영폰이었다.

"H열 14번!"
"어, 야 너잖아."


도토리 추첨을 하는 동안 여자 친구와 함께 우리 열은 안 걸린다고 실컷 불평하고 있을 당시 난데없이 우리가 앉은 자리, 정확히 말하면 바로 내 옆 자리 번호가 불렸다.

"야, 귀찮아. 오빠가 타와."
"싫어. 네 자리잖아. 그러니까 니가 가서 받아와."


평상시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나갔겠지만, 그날만큼은 자리를 고수하고 있어야만 했다. 만약 내 좌석 번호를 불렀는데, 여자친구와 자리를 바꾸어 박주영폰을 못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지금 생각해보면 좀 속좁은 생각이긴 하다). 그깟 도토리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박주영 폰 당첨자가 발표되는 순간.

'내꺼야. 내꺼. 내꺼. 내꺼.'

간절히 원하면 바람이 현실이 된다고 내 좌석 번호를 뽑으라는 강력한 텔레파시를 행사 진행자에게 쏘아댔건만, 행사 진행자는, "J열 00번!"을 힘차게 부르며 그 시도를 헛수고로 돌리고 말았다. 내 자리가 아닌 다른 좌석 번호가 불리는 순간, 거북이처럼 천천히 내 눈 앞까지 기어왔던 박주영폰은 번개처럼 저 멀리 내 마음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선배, 할 얘기 없을 때면 선배 핸드폰 한 번 꺼내줘요."

지난해 가을 한 후배와 술을 마시다 후배가 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내 휴대폰을 보며 했던 말이다. 그 이후 내 반드시 최신형 핸드폰을 사고자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기본이요, MP3는 필수에, 게임기 기능은 선택인 이 최신형 핸드폰이 어디 한두 푼인가. 때문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졸업이 내일 모레인데 집에 손을 벌려 핸드폰을 사달라고 할 수도 없고, <오마이뉴스>에서 받은 원고료 아껴 사볼까도 생각했지만 원고료 한 번 타기 위해 종종 열심히 생나무들을 키운 고생을 생각하면 그리 허무하게 돈을 날리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친구가 이런 저런 경품 행사에 참가해 각종 상품을 타는 것을 자주 보았기에, 내게도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청소년축구 대표팀 경기가 있던 바로 그날 최고의 기회가 다가왔으나 끝끝내 행운의 여신은 내 옆의 녀석에게 도토리만 가득 안긴 채 나를 외면하고 만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잊으려 해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박주영폰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건 난 박주영폰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벤트를 하던 그날 모 통신회사에서 테스트용으로 내놓은 핸드폰 게임 조작 방식이 누르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 자체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 홀딱 반해버렸다. 축구 행사와 연계하는 것이니 그것이 박주영폰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따름이었다.

두 번이나 벽과 불의의 충돌 사고를 경험하고도 멀쩡하디 멀쩡한 내 구형 핸드폰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부서지기라도 했으면 바꿀 핑계라도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러고보니 이 구형 핸드폰도 처음 살 때는 꽤 멋진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여기저기 금이 가고 아프다고 신음 소리를 내는 할아버지 폰이 된 것 같다. 2002년 이 핸드폰을 살 당시만 해도 엄마가 잃어버린다고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가지고 다니면서 애지중지 하지 않았던가.

한 때는 잘 나가는 모델이었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모델이었다.양중모
일명 '포르쉐폰'이라고 포르쉐 자동차를 닮은 디자인의 핸드폰을 보며 종종 만족감에 젖곤 했다.

"옛날에 처음 이 빨간 구두를 살 때는 참 예뻐보였는데, 지금은 보통 구두와 같아 보이니 참 신기해."
"그건 니가 그만큼 그 구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시나리오를 무려 3~4번이나 정독 했을 만큼 좋아했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빨간 구두 진열장을 보며 말하는 춘희(심은하 분)에게 철수(이성재 분)는 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고 보면 처음 살 당시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이 포르쉐폰이 애물단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숲 속에 백 마리 새가 있다고 한들 손 안의 한 마리 새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막상 너 왜 고장 안 나니 하며 구박에 구박을 하던 포르쉐폰이 진짜로 고장이라도 나버리면, 그 불편함에 새 핸드폰을 갖고 싶어 부서지기라도 하길 바라던 마음은 금세 잊어버리고 또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을 포르쉐폰에게 늘어놓을까.

"구형이면, 전화라도 잘 되어야지 말이야."

그런 상황이 온다면 포르쉐폰이 이렇게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덧붙이는 글 | 사람은 때로 자신의 곁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들에 대한 고마움들을 쉽게 잊곤 하나 봅니다.

덧붙이는 글 사람은 때로 자신의 곁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들에 대한 고마움들을 쉽게 잊곤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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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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