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나를 잊는다

통방산주 정곡 스님과 함께 한 통방산 산행

등록 2005.06.23 16:02수정 2005.06.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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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오년 전 햇살 좋은 초가을 오후였다. 명달리 도공의 작업실 뒷산을 조금 오르면 오솔길 중간 어디쯤 이젠 주위 풍경과 구별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집터가 있고, 그 오래된 집터에 그곳에 살았을 사람들이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온갖 공해와 소음에 시달린 도심의 은행나무 열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알 굵은 은행 줍기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들통을 등에 진 스님이 은행나무 아래 멈추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공방 뒷산 어딘가에 움막을 짓고 있다 했다. 스님은 은행 줍기에 온 정신이 팔린 중생들을 보고는 빙그레 미소만 짓고 그렇게 길을 떠났다.


여름을 견딘 무성한 풀로 뒤덮인, 한 사람이 겨우 비껴갈 만한 인적 없는 오솔길에서 은행줍기에만 몰두하는 물욕에 어두운 중생이나, 장난꾸러기 소년의 눈빛을 닮은 들통 맨 스님이나 온 산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가을 햇살 아래 어울리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리고 한동안 잊었다. 여전히 도공은 흙을 치대고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불을 피우고, 스님은 들통을 메고 숲길을 오르내리며 조금씩 오두막을 완성하고 있는 사이 둘은 좋은 이웃이 되어 있었다.

a 통방산 정곡사 해우소. 볼일을 다 본 뒤 재를 한 바가지씩 뿌리고 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통방산 정곡사 해우소. 볼일을 다 본 뒤 재를 한 바가지씩 뿌리고 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 이승열

a 창이 있는 오두막 풍경. 나무로 들어올린 소박한 문이 아름답다.

창이 있는 오두막 풍경. 나무로 들어올린 소박한 문이 아름답다. ⓒ 이승열

몇 년 간 공방에 드나들면서도 그곳은 명달리일 뿐이었고, 공방을 품고 있는 산 역시 이름을 가지지 않은 그냥 명달리 공방뒷산일 뿐이었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에서 승복 주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알고 들랑거리는 아기다람쥐를 친구 삼아 스님은 통방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볼 일을 보고 나서는 솥단지 가득 찬 재를 한 바가지 떠서 휙 뿌리면 되는 옛날 방식의 해우소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통방산에 둥지를 튼 스님으로 인해 공방뒷산이 통방산이란 본래 이름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곳이 계절에 맞춰 피었다 지는 온갖 들꽃들의 보고이며, 이항로 선생 생가 앞 벽계천에서 이어진 계곡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a 소나무로 둘러싸인 망명각.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바라보는 계곡 풍경은 나를 잊게 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망명각.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바라보는 계곡 풍경은 나를 잊게 한다. ⓒ 이승열


a 망명각에서 바라 본 죽계천의 여름, 겨울 풍경.

망명각에서 바라 본 죽계천의 여름, 겨울 풍경. ⓒ 이승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밧줄에 의지해 간신히 오르면 별안간 시야가 환하게 트이며 통방산을 휘감아 도는 하얀 계곡 죽계천과 일주암이 계곡 아래 저 멀리 까마득히 보인다. 스님은 이곳을 망명각(忘名閣)이라 했다. 주위 풍경의 아름다움에 이름을 잊고, 나란 실체를 잊고, 이곳 풍경과 하나가 되어 바깥과 안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결국 자연과 내가 하나라고 했다.


망명각에 처음 선 동생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을 잊는다. 아직 솔 냄새가 가시지 않은 통나무로 지어진 망명각에 벌렁 누워 쉬이 일어설 줄 모른다.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하며 설악산 온 골짜기와 능선들을 섭렵했던 동생은 망명각 풍경을 보고는 이제는 꿈이 되어버린 그리운 설악산을 떠올린다.

좋은 풍경을 보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은 인지상정. 결국 한 주 뒤 다시 통방산을 찾았다. 스님께 통방산 산행을 미리 부탁했다. 이름하여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여행. 통방산에 살며 이젠 통방산과 일체가 되어버린 스님의 통방산을 살짝 엿보기로 했다.


역시 '통'자 돌림인 견공 통천, 신통이를 앞세운 통방산 산행은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통방산 중간쯤에 스님의 거처가 있어 한 30분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a 통방산 가는 길. 햇살 한점 들지 않는 오솔길을 두시간쯤 걷는다.

통방산 가는 길. 햇살 한점 들지 않는 오솔길을 두시간쯤 걷는다. ⓒ 이승열


a 통방산 오르는 길 만난 나무들. 종이 다른 참나무 종류와 쪽동백나무가 공존하고 있었다.

통방산 오르는 길 만난 나무들. 종이 다른 참나무 종류와 쪽동백나무가 공존하고 있었다. ⓒ 이승열

스님을 빼놓고는 사람들도 견공들도 모두 숨을 몰아쉬었다. 중간 중간 설치한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는 몇 미터씩 뒤로 미끄러지는 가파른 흙길, 간신히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바윗길. 거의 사람들의 흔적이 닿지 않은 흔치 않은 산의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너구리들의 똥에서는 곰팡이가 피고, 멧돼지가 지나간 곳은 낙엽이며 풀들이 쏠려 있었다. 햇볕 한점 들지 않는 울창한 숲에 잊을 만하면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린 산뽕나무가 산행을 즐겁게 했고, 소박해서 더욱 아름다운 들꽃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스님은 땀을 흘리지 않는 지친 견공들을 위해 바위 틈새에 물을 준다. 이름대로 신통방통한 견공들이 하나는 앞서고 하나는 뒤에서 사람들을 지킨다. 650m 통방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3km, 두 시간이나 걸렸다. 스님의 사진에 나오는 해뜨는 모습이 장관인 소나무를 기대했는데 채 세 평이 되지 않는 조그만 공간이다. 1988년 복구한 표지석과 사람들의 염원인 돌탑이 통방산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소나무가 있는 스님 사진의 풍경은 이곳에서 1km 떨어진 삼태봉이라 했다. 너무들 지쳐 삼태봉은 다음을 기약했다. 여름이 가기 전 나리종류라고 잘못 알려준 삿갓나물 군락의 꽃이 만개할 무렵 다시 오자 약속했다.

a 통방산 숲길. 사람도 다니고, 다람쥐도 다니고, 멧돼지도 다니는 길.

통방산 숲길. 사람도 다니고, 다람쥐도 다니고, 멧돼지도 다니는 길. ⓒ 이승열


a 좁고 가파른 통방산 등산로. 가장  씩씩한 사람은 스님을 빼고는 가장 어린 한진호.

좁고 가파른 통방산 등산로. 가장 씩씩한 사람은 스님을 빼고는 가장 어린 한진호. ⓒ 이승열

하산 길은 더욱 고달팠다. 경사가 심한 흙길은 체중을 발가락으로 향하게 했고, 두꺼운 목장갑을 꼈음에도 밧줄에서 발생한 마찰열이 손바닥을 화끈거리게 했다. 앞서가던 스님이 길 옆에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는 독사를 쫒았다. 맹독성을 가진 아주 위험한 놈이라 했다. 숲 속 깊이 한참을 쫒고는 이렇게 해야 사람들 소리가 나면 미리 피해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한다. 사람과 독사가 모두 다치지 않고 제 영역을 지키면 그만이었다. 독사와 피로로 풀리기 시작한 다리가 비소로 후들거린다.

오디를 먹고 그대로 똥을 뿌린 보랏빛 씨앗이 드러난 평상에 앉아 내가 오늘 걸었던 숲과 능선과 나무들과 꽃들을 떠올렸다. 산은 여전히 그곳에 있으나 이미 그곳은 내가 전에 알고 있던 공방 뒷산이 아니었다.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돌탑에 누군가가 다시 돌을 쌓고, 내가 보고 온 더덕이 조금씩 씨알을 살찌우며 자줏빛 꽃을 피우려 준비하는 통방산이 되어 있었다.

a 보라색 오디를 먹은 새는 보라색 똥을 싸고, 산딸기를 먹은 새는 빨간색 똥을 싼다.

보라색 오디를 먹은 새는 보라색 똥을 싸고, 산딸기를 먹은 새는 빨간색 똥을 싼다. ⓒ 이승열


a 산행을 마친 후 통천과 신통이가 사람보다 더 지쳤나보다. 조카 진호에게 등을 빌려준 견공이 통천이. 신통이는 동물들을, 통천이는 사람들을 각각 지킨다 한다.

산행을 마친 후 통천과 신통이가 사람보다 더 지쳤나보다. 조카 진호에게 등을 빌려준 견공이 통천이. 신통이는 동물들을, 통천이는 사람들을 각각 지킨다 한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지난 12일, 19일 두번에 걸쳐 통방산에 다녀온 기행문입니다.
- 통방산 가는 길은 검색창에 통방산 정곡사를 치면 됩니다.
- 스님의 홈에서는 통방산의 풍경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볼 수 있습니다.
- 알려지지 않은 곳을 구태여 알려주어 망가지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닌지 적잖이 고민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보존 방법은 그대로 두고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12일, 19일 두번에 걸쳐 통방산에 다녀온 기행문입니다.
- 통방산 가는 길은 검색창에 통방산 정곡사를 치면 됩니다.
- 스님의 홈에서는 통방산의 풍경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볼 수 있습니다.
- 알려지지 않은 곳을 구태여 알려주어 망가지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닌지 적잖이 고민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보존 방법은 그대로 두고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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