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인민재판이 '익명성' 탓이라고?

칼이 범죄에 이용된다고 칼을 못 쓰게 할 것인가

등록 2005.07.01 00:00수정 2005.07.0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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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누리꾼은 사회변혁을 이끄는 세력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악플과 인권침해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2002년은 네티즌 파워가 국내외를 뒤흔든 한해였다"며 '행동하는 네티즌'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저널> 표지.
한 때 누리꾼은 사회변혁을 이끄는 세력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악플과 인권침해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2002년은 네티즌 파워가 국내외를 뒤흔든 한해였다"며 '행동하는 네티즌'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저널> 표지.시사저널 제687호
최근 불거진 '개똥녀' 파문을 두고 설왕설래가 빈번하다. 누리꾼들의 성토가 한동안 빗발치고 난 뒤 이제는 우려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언론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이 처음 발생한 건 아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입씨름 끝에 상대방에 주먹을 썼던 한 남학생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돼 결국 휴학하게 만들었던 일, 도둑 누명을 쓰고 한 여고생이 자살하자 해당 여학생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여고생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서 돌던 일, 변심한 애인 때문에 딸이 자살하자 어머니가 인터넷에 사연을 올려 누리꾼들에 의해 애인의 신상정보가 공개돼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만든 일 등 유사한 사례는 많았다.

이러한 '사이버 여론재판'은 왜 일어나는 걸까. 대다수 언론은 사이버 여론재판의 배경으로 '익명성'을 이야기 한다.

사이버 여론재판은 '익명성' 탓?

익명성(匿名性)이란 실명, 연령, 성별, 신분 등 개인정보가 일체 공개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익명성이 사회적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한 건 거의 일세기 전이다. 20세기 초반 대중사회의 등장으로 그 이전 시기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대면접촉 방식이 생겨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에 지연과 혈연으로 얽혀있는 사회에서 '개인'은 '집단'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누구의 몇 째 아들 혹은 딸'이라는 게 출생과 더불어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초래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도시공동체를 이루게 했다.


획일화되고 원자화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도시공간의 익명성과 더불어 부정적인 용어로 덧칠됐다. 대중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가치관, 인간관계, 도덕률 등이 붕괴된다고 엘리트들은 보았기 때문이었다. 60,7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될 때 우리사회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중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만연했다.

익명성은 인터넷이 보편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논의로 재부상했다. 인터넷은 그야말로 익명성의 세계이다. 자신이 만든 ID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자유로운 사상과 의견 소통 가능케 해

사파티스타의 상징 스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위 참가자. 사진 내용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파티스타의 상징 스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위 참가자. 사진 내용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김은주
익명성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혜택은 많다.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익명성은 자유로운 사상과 의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다.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나 '국제사면위원회'와 같은 인권단체는 인터넷을 통해 회원 및 반체제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익명성 덕택에 이러한 단체들은 억압적인 정부의 감시를 피해 정치적 담론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도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인권운동, 국가의 민주화 등에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수 엘리트들이 독점하던 언론환경은 인터넷 등장 이후 공론의 장이 다양하게 마련되면서 언로 확대를 가져왔다. 이는 언론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또한 효순, 미선양을 숨지게 한 미군규탄 촛불시위, 탄핵 반대 촛불시위,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시위 등에서 보여지듯 인터넷을 통한 자유롭고, 손쉬운 의견 교환은 참여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장점 덮어버리는 익명성의 폐해들 '사회적 살인행위'

그러나 익명성이 가져온 폐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사생활 공개, 명예훼손, 사이버 범죄 등은 한국사회에서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 해 경찰청에 신고 된 사이버 범죄는 20만 건이 넘었다. 사이버 익명성을 배경으로 나타난 범죄의 발생 양상은 범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억울한 사연이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제보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면 누리꾼들은 이를 삽시간에 퍼 나른다. 이 과정에서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 나도는 것은 물론, 관계자들의 개인 신상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거짓제보로 들통 난 사연도 있고, 애꿎은 사람이 억울하게 범죄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대구의 한 고등학생이 백혈병에 걸려 긴급 수혈을 필요로 한다는 글이 퍼졌던 적이 있다. 피해자 어머니는 전화 세례로 한동안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그 학교의 홈페이지는 마비됐지만 확인 결과 쪽지는 장난으로 드러났다. 또 밀양 성폭행 사건과 관련 없는 사람의 사진이 인터넷에서 돌아 피해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사례도 있었다.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서 누리꾼들의 성토가 정당성을 부여받는 건 아니다. 개인의 신상정보나 사진 등을 찾아내서, 여러 게시판에 퍼 나르고, 그가 다니는 직장 혹은 학교의 홈페이지에 온갖 비난의 글을 남겨 마비시키거나, 전화로 악담을 퍼붓는 건 개인의 사회생활을 정지시키는 또 다른 범죄이다. 이는 사회적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칼이 범죄에 이용된다고 칼을 못 쓰게 할 것인가

하지만 '사이버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누리꾼들을 싸잡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대다수 누리꾼들의 행위에 담긴 진정성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심한 애인 때문에 자살한 여자를 위해 그 애인에게 집단적으로 비난을 한 사례를 보면, 사랑과 상호 신뢰가 우리사회에서 퇴색되지 않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혈을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누리꾼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또 '개똥녀' 파문에서 드러난 누리꾼들의 집단행동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과도기적 폐해일 뿐이다. 익명성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규제 운운하는 건 결국 인터넷이 가져올 공동체의 이득마저 외면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리꾼들이 되살린 효순·미선 사건
누리꾼들이 되살린 효순·미선 사건오마이뉴스 남소연
일반적인 사이버 범죄는 익명성을 범죄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범죄로서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칼이 범죄에 이용된다고 해서 '누구도 칼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논리 비약이다. 익명성이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익명성은 상술한 혜택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해서 성숙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사이버 세계가 공공의 영리를 위해 쓰이고 역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기술발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보조를 맞춰야 한다. IT산업이 급성장하면서 기술발전이 창출하는 산업적 경제적 측면만 부각할 뿐 그것이 초래하게 될 다양한 사회·문화적 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인식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누리꾼들 스스로의 대오각성도 필요하다. 익명성으로 얻게 되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통신망인 네트워크(network)와, 시민을 뜻하는 시티즌(citizen)의 합성어인 네티즌(netizen)의 의미는 단순히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이를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온라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책임의식을 가진 문화적 활동주체라는 말이다.

거대 언론, 누리꾼 쫓아가기 바빴다
'댓글 저널리즘'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 왔나

▲ 2004년 12월 누리꾼들은 `밀양 여중생 성폭력` 사건 가해자 및 경찰의 미흡한 수사를 규탄하는 촛불행사를 광화문에서 열었다.
ⓒ오마이뉴스 이민정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의제설정 기능은 지배 권력과 결탁한 소수 독점 언론이 장악해 왔다. 아무리 긴요한 사안이라 해도 이들 매체가 다루지 않으면 주요 뉴스가 될 수 없었고 반민주, 반역사적인 사안이어도 이들이 다루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제 선점'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을 일으킨 줄기는 인터넷을 활용한 '온라인 저널리즘' 특히 '댓글 저널리즘'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의제설정을 장악한 기존 언론권력을 끊임없이 해체해 온 시민참여민주주의는 인터넷을 통해 극대화 되었다. 이제는 초기 정치 경제의 무거운 사안에서부터 일상 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저널리즘, 댓글 저널리즘이 그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일상에서 흔히 무시되기 쉬운 인권에 대한 관심이 인터넷을 통해 크게 높아가고 있다.

하지만 익명성에 기댄 '악플'(악성댓글)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어 내거나 사이버 폭력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고 오히려 인권 침해를 일으키는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저널리즘, 댓글 저널리즘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밝은 곳으로 드러내고 더 나은 사회로 진전시켜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누리꾼들의 활약상을 보자.

○… 2000년 1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란 취지로 '우리 모두' 사이트가 생겼다. 1년 사이에 무려 270만 명이 넘게 방문한 이 사이트는 언론개혁 운동의 사이버 근거지가 되며 이후 누리꾼의 대활약을 예고했다.

○… 같은 해 4.13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출마 부자격자 낙선운동'이 시작됐다. 누리꾼들의 지속적 홍보는 구태정치인 퇴출에 톡톡히 한몫했다.

○… 같은 해 7월 3일. 54살로 정년을 3년 남겨 놓은 한 형사는 '法위에 군림하는 記者'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을 비롯한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소속 형사 3명의 전보 조처가 부당하다는 항명의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다. 당시 남대문서에 출입하던 MBC기자가 새벽에 술에 취해 기물을 파손하며 행패를 부렸는데 이를 제지하던 형사가 오히려 문책성 전보 조처를 받았다는 것. 수많은 누리꾼들이 MBC와 남대문경찰서, 서울지방경찰청에 몰려가 항의를 했다. 결국 MBC는 남대문서에 파손된 기물을 배상했고, 해당 기자에게 4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좌천'됐던 세 명의 형사도 각각 인사 조처가 재조정됐다.

○…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13일은 지방선거가 실시된 날이자 비극이 일어난 날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지방도로 갓길에서 미군 궤도차량이 미선과 효순 두 여중생을 덮친 것. 두 여중생의 죽음은 사건 발생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미 군사법원은 사고 차량의 운전병과 관제병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고 무죄를 받은 미군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 해 11월 27일 한 네티즌이 인터넷 한겨레 게시판에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를 제안했다. 이는 순식간에 급속히 확산되었고 3일 만에 마침내 10만 인파가 촛불의 바다를 만들었다. 이 사건은 뒤에 불평등한 소파 개정 논의를 활발하게 하는 구실을 했다.

○… 2004년 1월, 건교부가 추진한 자동자번호판 디자인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누리꾼들은 다양한 색으로 디자인된 여러 나라 자동차 번호판을 올려놓거나 자신들이 디자인한 작품들을 올렸다. 결국 정부는 새로 도입한 자동차 전국번호판을 교체하기로 했다.

○… 2004년 12월 7일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보도 당시만 해도 이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로 보였다. 그러나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에 '밀양집단윤간사건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정보와 의견을 나누며 12월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철저한 수사와 은폐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열었다.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용의자 구속 확대, 울산남부경찰서 서장 대기발령, 수사팀 교체라는 결과를 낳았다.

○… 2005년 1월 훈련 과정에서 인분을 입에 넣는 등 지나친 가혹행위를 한 논산훈련소의 인분가혹 행위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군대 인권문제 개선에 관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 같은 달 8일, 빵 1개에 단무지 2~3쪽, 게맛살 4조각, 삶은 메추리알 5개, 튀김 2개가 담겨있는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떴다. 이 사진은 제주 서귀포를 넘어 전국을 '부실도시락' 여론으로 들끓게 했다. 결국 서귀포 시는 급식방법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 2005년 4월 11일 오전 추돌 사고를 일으키고 달아났다가 11시간 만에 나타난 가수 김상혁씨에게 경찰은 당초 뺑소니 혐의만 인정하고 음주운전은 무혐의 처분했다. 누리꾼들은 김씨의 개인 블로그에서 김씨 친구가 "그날 나랑 술 먹다가 걸려서 마음이 좀 그렇다"라고 남긴 글을 발견해 제보했다. 경찰은 수사를 다시 시작해 음주운전 혐의로 추가입건했다.

○… 2005년 4월 10여 년간 알코올 중독으로 병든 조부모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러 온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강릉 여중생을 구명하려는 목소리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울려 퍼졌다. 결국 5월 9일 강릉 여중생의 구속이 취소됐다.

○… 같은 해 5월 초에는 신생아를 학대한 사진이 공개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찌그러뜨리거나 비닐가방에 넣는 등의 사진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다른 미니 홈피에 실린 희롱 사진들도 추가 폭로해 아동 인권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 김헌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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