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 전망대 오르기와 도심 걷기 ①

[뉴질랜드 여행기 11] 왕가누이의 두리 힐에서

등록 2005.06.24 14:45수정 2005.06.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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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이 처음 도착한 낯선 도시를 한눈에 파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전망대에 오르기.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 도시들은 시가지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를 한두 개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망대는 서울의 남산이나 오클랜드의 원트리 힐과 같이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높은 산이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연적인 전망대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높은 위치에 인공의 전망대를 세우기도 한다. 남산의 서울타워나 오클랜드의 스카이타워가 그런 경우다.


자연적인 전망대가 있는데도 비싼 돈을 들여서까지 인공의 전망대를 세우는 것은 속된 말로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도시를 발 아래에 두고 굽어보는 맛이란 장쾌하기 이를 데 없어서 많은 여행객들은 기꺼이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도시를 굽어볼 때 여행객은 도시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몸의 수직 운동을 통하여 획득된 이 도시의 지리학은 언제나 현재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현재는 거칠고 희미한 윤곽선 안에서 도시의 개략적인 특징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그걸로도 충분한 도시들이 있고 또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객이라면 도시의 거리를 걸어보지 않고서는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도 <걷기 예찬>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중요한 취재를 위하여 외국의 도시에 처음 도착하는 기자들이 있다. 보통의 기자는 곧바로 취재원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러나 대기자는 호텔 방에 짐을 던져놓은 즉시 그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아무런 선입견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는다. 그는 그 도시의 빛이, 그 도시의 냄새가, 그 도시의 소리가, 요컨대 그 도시의 구체적인 삶이 자신의 몸 깊숙이 스며들 때까지 걷는다. 그 전체적 삶의 환경이 그가 취재하는 구체적 문제의 조건이요 바탕이 될 것이다."

여기서 기자를 여행객으로 바꿔놓는다고 해서 그의 말이 결코 틀린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도시의 거리 특히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심의 거리를 걷는 것은 그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손쉬운, 그러나 필수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도심의 거리를 걷는 이 수평 운동은 도시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도심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도로명과 건물과 기념물과 현수막들은 도시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 내일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도시의 역사학을 통하여 도시의 문은 비로소 열리고 그 세부를 낯선 여행객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박물관과 극장의 문을, 맛난 음식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라면 카페와 레스토랑의 문을 먼저 열어볼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넓은 광장이나 좁다란 골목에서 문을 발견할 지도 모르고, 오래된 성당이나 이국적인 사찰의 문을 두드려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객이 도심의 거리를 걸으면서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여러 개의 문들 중 몇 개를 열고 들어가 볼 때, 도시로의 여행은 비로소 시작된다.

인구 4만 명이 조금 넘는 아담한 도시 왕가누이(Wanganui)를 돌아보는 우리의 여행은 바로 이 수직운동과 수평운동, 즉 전망대 오르기와 도심을 걷기, 다시 말해서 지리학과 역사학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하루를 이 도시에서 묵고 가기로 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두리 힐의 전망대에서

아찔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포장의 팡가누이 강변도로를 달려 왕가누이에 도착한 것은 약 1시 30분 경. 우리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눈에 띈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난 후, 우선 전망대에 올라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기로 했다.

전망대는 대부분 도시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왕가누이의 경우에는 조금 달라서 동쪽에 치우쳐 있었다. 왕가누이에 이르러 태즈만해와 만나면서 넓어지고 유장해진 팡가누이 강은 도시의 동서를 가르면서 흐르고 있는데, 보다 평탄한 지역인 서쪽을 중심으로 도심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두리 힐에 자리잡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
두리 힐에 자리잡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정철용
그래서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 전망대가 있는 두리 힐(Durie Hill)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돌로 축조한 듯한 회색의 거대한 기념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몰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5년에 세워진 것인데, 왕가누이 시가지를 굽어보는 전망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는 이 탑의 내부를 우리는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176개의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 33.5m 높이의 그 정상에 섰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한 그물 철망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편안하게 시선이 가 닿는 저 멀리 북쪽으로 루아페후산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태즈만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장쾌하고 거칠 것 없는 전망이었다.

밑에서 올려다 본 제1차 세계 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의 모습
밑에서 올려다 본 제1차 세계 대전 전몰 용사 기념탑의 모습정철용
그러나 우리가 정작 보고 싶었던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 어깨 높이쯤 쌓아올린 보호장벽에 좀 더 밀착해서 아래를 굽어보아야 했다. 조금 불편한 자세로 그렇게 굽어보고 있자니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도시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그리 좋지 못한 시설이었다.

땅속운행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실 왕가누이 시내를 굽어보는 전망대로서는 이 기념탑 바로 앞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옥탑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여행 안내서에도 1919년에 건설된 이 두리 힐 엘리베이터를 기념탑보다 더 강조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전망 때문이 아니라, 이 엘리베이터가 세계에서 단 두 대뿐이며 남반구에서는 유일한 땅속운행(earthbound) 엘리베이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두리 힐의 땅속운행 엘리베이터의 승차장 입구
두리 힐의 땅속운행 엘리베이터의 승차장 입구정철용
그러한 명성 탓인지 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데는 승차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왕복 요금이 어른 1달러, 어린이 50센트.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는 안내양(그러나 한국에서처럼 산뜻한 제복을 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아줌마였다)에게 돈을 지불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넓기는 했어도 목재로 마감된 낡은 벽은 이 엘리베이터가 아주 오래된 것임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약간의 공포감마저도 들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 뚫려 있지 않고 꽉 막혀 있어서,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1분 정도 내려가서 멈춰선 지점은 66m 아래쪽. 그 지하를 언덕 아래쪽 도로변에서 시작된 205m의 수평 터널이 지상과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터널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마치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어두컴컴하고 삭막한 터널을 둘러본 후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호출하여 다시 올라탔다.

이번에는 내려오면서 얼굴을 익힌 엘리베이터 안내양, 아니 안내아줌마와 눈을 맞추었다. 보통의 엘리베이터라면 숫자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연두색 카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나는 그것이 무슨 카드들이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건 주민들의 엘리베이터 승차권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언덕 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는 시내로 출퇴근하거나 볼일 보러 나갈 때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그들의 승차 카드를 비치해 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와 다리만 건너면 바로 도심으로 이어지니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리 힐의 이 엘리베이터는, 여행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관광용으로는 너무 소박하고 구식이고 평범해서 다소 실망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언덕 위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교통수단인 셈이다. 이 엘리베이터 덕택에 언덕 위에 사는 주민들은 언덕과 그 아래쪽 다리 앞 도로를 이어주는 191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말이다.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바라다본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
엘리베이터 옥탑에서 바라다본 왕가누이의 시내 전경정철용
그래도 못내 아쉽고 어쩐지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여행객이 있다면, 그 옆 엘리베이터 옥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보기를 나는 권한다. 그 옥탑에서 바라다보는 왕가누이 도시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엘리베이터에서 느낀 실망을 위로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층빌딩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거리와 숲 사이로 보이는 색색의 낮은 지붕들이 아름다운 주택가,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 도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조금 번화한 시골 읍내를 바라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당장에 왕가누이가 맘에 들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 중에서도 나의 시선은 강물에 오래 머물렀다. 내 기억 속의 어떤 강물도 지금 그렇게 흐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 <두리 힐 엘리베이터 운행시간>

- 월요일 ~ 금요일 :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 토요일          :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일요일 및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난 해 4월에 다녀왔던 뉴질랜드 북섬 남부지역의 여행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두리 힐 엘리베이터 운행시간>

- 월요일 ~ 금요일 :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 토요일          :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 일요일 및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난 해 4월에 다녀왔던 뉴질랜드 북섬 남부지역의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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