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97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24 18:36수정 2005.06.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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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해상.


"우에엑~"
"우웍!"

여기저기서 토하는 소리가 진동했다. 오물을 받도록 놓아둔 통에 두어 사람씩 매달려 끅끅 거리고 있었다.

"제발 나가게 해 주시오. 바깥 바람 좀 쏘이게 해달란 말이오."

누군가 갑판에 오를 수 있도록 해달라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안 돼. 해안이 보이는 곳에선 밖에 나갈 수 없다니까."


"그러면 눈이라도 가리고 내보내면 될 거 아니오."

"…."


갑판 위로 오르는 문을 막아선 선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멀미도 멀미였지만 누울 자리도 확보가 안 될 만치 사람으로 가득 찬 선실은 한 마디로 찜통이었다. 땀으로 그득한 고약한 냄새야 익숙해지기라도 했다지만 숨이 막혀 오는 더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에잇. 그렇게라도 하려무나."

다른 사람이 따라붙어 눈가리개를 하고서야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영중은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 처음 타 보는 배였다. 대동강으로 지나는 배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적은 있어도 강을 건너는 나룻배에 올라보기는 자주 했어도 이런 큰 배에 실려 바다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속이 미식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벌써 이틀. 배 안에서 흔들린 지도 벌써 이틀이나 되었다. 이틀이 이 년만큼 길었다.

"영일아, 넌 좀 괜찮으냐?"

선실 벽에 머리를 박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영일을 향해 물었다.

"예, 형님."

말은 그래도 영중보다 더 죽겠는 모양이었다. 영일의 얼굴은 허옇게 핏기가 걸려 있었다. 갑판 위에서 바람이라도 쏘이면 나으련만 문까지 닫아 놓은 선실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속이 더 울렁거렸다.

"동생분을 좀 뉘이구려."

영중만큼은 아니래도 나이 수굿해 보이는 자가 자기 자리를 좁혀 공간을 마련하며 권했다. 까만 얼굴에 하관이 다부지면서도 선한 끼가 역력한 사내였다. 영중과 영일은 마지막에 합류한 터라서 지난 이틀 간 별로 말을 섞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고맙소이다."

"난 해주 살던 판개라 하우. 이 아인 친아우 되는 또판개고."

"두 분이 내색은 안 해도 어째 닮았다 했소. 나 평양 사는 영중이라 하오. 이 아이가 아우 영일이오."

누워있는 영일은 겨우 고개만 끄덕여 눈인사를 했다.

" 아니, 얼마나 멀리 있는 섬이기에 이리 며칠을 간단 말이오."

영중이 물었다.

"멀어서 그런 게 아니우. 이 배는 그냥 뱅뱅 돌고 있수. 못 느끼시겠지만 아까까지도 파도를 맞받으며 가던 배가 파도를 옆으로 받고 있소. 그 짓을 계속하고 있는 거유.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판개가 나름대로의 짐작을 이야기했다.

"아니, 그럼 해안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란 말요?"

옆의 사내가 끼어들며 물었다. 그도 혈색이 걷혀 있었다.

"해안이 보일 정도의 연안이라면 파도가 이리 높을 리가 없지요. 그리고 노 젓는 소리를 들은 게 언제요? 어제? 그제? 순전히 바람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거외다. 연안도 아니고 굳이 어느 방향을 정한 것도 아니란 얘기지."

판개가 덧붙였다.

"그럼 우리가 벌써 당도했을 길을 이 멀미를 하며 생고생을 하고 있단 거여?"

"아니, 왜 그런 짓을?"

어느 새 이쪽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지 여기저기서 사람들 목청이 커졌다.

"다 이유가 있겠지요. 우리로 하여금 해안을 전혀 볼 수 없게 한 것도 이 배의 방향을 짐작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이리 에도는 것도 거리를 가늠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허~거 참. 더러워서. 개화군인지 화적뗀지. 한 번 투신하겠다고 맹서를 했으면 사내의 말을 믿을 것이지. 이런 식으로 의심을 해? 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모다 광산에서 시험을 거친 사람들이 아니냔 말여!"

멀미에 고생을 많이 했는지 옆의 땅땅한 사내가 괘씸한 듯 언성을 높였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지요."

판개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멀뚱히 판개를 쳐다봤다. 넌 배알이 없냐는 표정이 섞이기도 했지만 배에 오르기 전부터 판개라는 이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는 눈빛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조련을 받고 밖으로 쏟아져 나올 텐데 그 중에 누가 변절을 하리라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런 식으로 모든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노릇이지요. 해도라 이르는 곳의 위치를 모른다 한들 우리에게 해 될 게 무엇이냔 말이지요."

판개의 말에 열이 올라 있던 사람들도 더 이상 불평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배운 건 없어 보이는데 말하는 투는 참 조근조근했다.

"그런데 노형과 아우 되는 분은 멀쩡해 보이오."

영중이 물었다.

"실은 얼마 전까지도 뱃일을 했더랬지요. 아버님이 바다에서 돌아가시고 노모 때문에 그만두기는 했습니다만, 되도 않을 농사가 맞을 리도 없고, 그래 먹고 살 길이 없어 광산에 들었다가."

"그랬고만요. 그런데 그냥 광산일을 하시지 하필 이 험한 일에?"

"글쎄, 노임이야 광산일보다 더하면 얼마나 더하겠소만, 아무래도 취지가, 우리 같은 것들이 살만한 나라를 만들겠다는데 한 번 해볼 만한 일 아니겠소."

판개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었다.

"그래도 이건 영판 잔칫날 쓸 돼지로 키우겠다는데, 그냥 조련만 하고 어디 한가한 국경에서 왔다 갔다 하는 벙거지 나부랭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랏일에 반해서 한 번 들고 일어나겠다는 건데, 그리 멀지 않은 시일 안에 우리가 전장으로 나서게 되는 것 아니겠소?"

영중이가 시큰둥한 척 슬쩍 떠봤다.

"어허 이 사람, 아 그렇게 염려스러우면 광산에 남지 뭐하러 지원했노? 혹시 이 사람 간자(間者) 아녀? 입영 전에 같이 지내는 보름동안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다 솎아진 걸로 아는데. 보름간 귀에 딱지가 앉은 얘기는 귓등으로 들었는가?
어차피 우리가 안 나서면 이놈의 나라는 양놈들이나 노서아가 꿰찰 것이고 그도 안 되면 뙤놈이나 왜놈들이 들어차게 된다잖어.
그리고 그놈들이 차지하면 양반이나 지주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고. "

"어디 그것뿐입니까요, 한번 뒤집기만 하면 양반이나 상것이나 구별 없이 살 수 있다는데, 그리고 우리 같은 것도 자기 땅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 날 있겠지요. 이놈의 세상,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한 목숨 내걸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천주쟁이들이 말하는 그 천국이란 것이 땅위에서 구현되는 것인데."

영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내와 젊은이가 나섰다.
입영 지원을 받고 선발과정을 거치고 합숙을 하면서 조련관들이 지원자로 위장해 불평불만자나 사상적으로 부적격한 자들을 추려냈다 하는 사실은 이들이 선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어 알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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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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