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흰 쌀밥을 보고는… 그렇게만 먹으면 조만간 죽는대도 여한이 없겠기에…."
땅땅한 사내가 아까 언성을 높이던 때와는 다르게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제 탈락할 염려는 없다 싶었는지 맘에 있는 말을 내 뱉었다.
"사실 다 그렇지 뭐. 지상 천국도 좋고, 자주개화도, 만민평등도 좋기야 하지. 헌데 급한 게 목구멍 아니겠어. 지금 당장 먹을 수 있어 좋고, 운이 좋아 변이 성공하면 더 먹을 수 있어서 좋고."
"꼭 아니라고는 못하지."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를 냈다. 영일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영중, 영일 형제는 숯막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숲으로 안내 되어 꼬박 하루를 걸었다. 그리고는 어느 광산에 도착했는데 그땐 이미 이 사람들이 출발준비를 마친 뒤였다. 그리고는 쉴 겨를도 없이 청천강까지 이동했고 거기서 이 배에 올랐던 것이다.
각기 한 바리나 되는 짐들을 지고 좋지 않은 날씨에 강행군을 하는 탓에 청천강까지 이동하는 동안은 서로 간에 사담을 나눌 짬이 없었다. 겨우 배에 몸을 싣고야 기회를 보며 사람들의 말을 주워 담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멀미로 고생하느라 태반을 흘려듣고 이제야 일행들과 말문을 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헌데 그 개화군인가 뭔가 하는 게 우리들 뿐만이 아닌가봐?"
땅딸한 그 사내가 화제를 바꿨다.
"맞어 맞어. 우리를 호위해 주었던 그 운산 관아의 포졸들 말이요, 거 그치들 혹시 우리와 동패 아녀?"
누군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정작 포졸들이면 뭐가 아쉬워 그러느냔 말야. 어디 그놈들이 피빨아먹을 데가 없어 우리 꽁무닐 따르며 호위를 자처해?"
"그건 모르지. 광물 운송 호위야 짭짤한 벌이가 될 텐데 누가 마다해. 그저 돈이면 다지 다야."
우마차까지 동원한 70여 명 일행은 포졸 여섯의 호위를 받아 청천강까지 이동했었다. 중간 중간의 기찰 경수소를 지날 때면 중요 광물을 운송하는 광산인들을 호위하기 위한 운산 관아의 나졸들이라 밝히는 것을 듣기는 하였으나 참말 포졸인지 변복한 광산 사람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거짓이라 보기엔 운산 군수의 수결이 있는 서장(書狀)이 의심을 받아본 바가 없으며 호위 포졸을 인솔하는 포교의 하는 짓이 짐짓 위장한 자의 자색은 아니었다.
"아냐, 아냐. 자네들 우리가 지고 온 짐이 다 뭔지 알기나 하는가?"
"짐이라니? 아, 그거야 다 광물아닌가? 가만…? 우리가 왜 광물을 지고 조련을 받으러 가?"
"거 보라니까. 아 글쎄 그게 다…."
말을 하려던 사내는 살짝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게, 다 화약이여."
"화약?"
다들 화들짝 놀랐다.
"어쩐지… 내가 곰방대를 꺼낼 때 운송관이 그리도 길길이 뛰던 게 다 이유가 있었고만."
"아니, 자네는 그걸 어찌 알았어?"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코가 여간 예민한 코가 아니거든. 오죽하면 정주 개코라 할까봐."
"그래서 화약 냄새를 맡았다?"
"그렇지. 객주 헛간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베고 누운 그 짐이 어찌나 냄새가 독하던지. 그래서 뭔가 구경이라도 하려고 기름종이를 살짝 뜯어보려는데 옆에 자고 있던 포교 놈이 슬며시 내 손을 잡더구만. 무슨 경고라도 하는 양 말일세."
개코라는 이가 야단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그랬어? 그렇다면 그 치들도 개화군과 동패임이 틀림 없구만."
"어? 내 짐은 훨씬 묵지근 했는데? 간혹 상자에 털럭이는 느낌이 광물이 틀림 없었다니까. 화약은 아닌 것 같더구만…."
다른 이가 나섰다.
"몇 짐은 참말 광물일런지도 모르지."
땅딸보였다.
"그래도 그 포교 하는 양을 보면 영판 관아 찌끄레기가 적실해 보이던데…."
"알 수가 없지. 참말 포교인데 우리처럼 개화당 패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자인지도. 우리가 승선한 곳이 어딘 줄 알기나 해?"
이번엔 사려 깊은 판개가 뱉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러시우?"
다시 관심이 판개에게로 모아졌다.
"청천강 초입의 병풍 같은 바위가 뾰족하게 둘러있는 봉우리가 어디에서 흘러온 듯한 모습이지 않았소?"
"그랬소이다."
"그게 태향산(汰香山)이오. 그 아래가 수군의 방어진인 노강진이지."
"아, 그래서?"
대화하던 사내가 갑갑하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그 상류에는 전선을 정박시키는 전선포(戰船浦)가 있는데 바로 이 배가 거기서 떴단 말이지."
"에이, 그래도 몇 푼 쥐어주고 나루를 빌었겠지."
"그러면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직접 나서 행선을 지켜보나?"
"첨절제사가 직접 나섰다고?"
"어허, 이 사람. 눈구멍은 가죽이 모자라 찢고 다니는 게야? 먼발치서 바라보던 이가 장수의 복장이 아니었는가 말야."
판개가 갑갑한 듯 목청을 돋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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