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매실 담그는 날

올해는 65kg이나 담갔습니다

등록 2005.06.25 07:52수정 2005.06.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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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럽게 열린 매실
탐스럽게 열린 매실정명희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처럼 남기고 간 매실은 지난해 첫 결실을 보았는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대여섯 배는 더 열렸다고 하였다.


엄마는 매실 수확기가 다가오자 매실을 따는 것이 크나큰 걱정거리였다. 다행히 오빠가 휴가를 내고 매실 따기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큰 언니네가 자신들의 일을 미리 해놓고 엄마네 매실을 따 주었다.

나는 지난해에, 내년에는 확실히 한 일꾼 하겠다며 큰소리 탕탕 쳤으나 결과적으로 그러하지 못했다. 하필 시댁의 양파 수확과 친정의 매실 따는 날이 겹쳐 올해 매실은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 열매만 탐하게 되었다.

얼마간의 값을 지불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수고 없이 매실을 가져오자니 저어기 미안했다. 해서 내년에는 정말로 매실 따기에 '확실히' 동참할 것임을 엄마에게 맹세하였다.

"그런데, 니는 매실을 얼마나 가져갈 꺼고?"
"엄마는 내가 얼마나 가져갈 것이라 생각해?"

"몰라, 니 전에 한 30kg 가져간다 하지 않았나."
"그랬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엄마 한 50kg 담고 싶다."


"아이고, 그 만큼 담아서 어쩔려고?"
"엄마, 먹는 것은 걱정하지 마라. 작년에 15kg 담은 것은 저 녀석이 다 먹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인듯 남기고 간 매실밭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인듯 남기고 간 매실밭정명희
나는 형과 함께 농에서 이불이란 이불은 다 꺼내놓고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뛰어내리기 놀이를 하고 있는 둘째를 가리켰다.


"○○이가 매실을 그렇게 좋아하는구나. 다 먹을 자신 있으면 50kg 가져가거라."

그런데 오빠가 그날 딴 매실 중 조합에 보내고 남은 매실을 몽땅 가져가라며 65kg인데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오빠, 담는 김에 왕창 담지 뭐. 그래, 다 넣어 줘."

나는 매실 65kg이 얼마나 되는지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나중에 집에 와서 매실을 수레에 실으려고 트렁크를 열어보니 어머나, 세 자루나 되었다. 저걸 어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65kg은 무리야. 그래서 25kg은 뚝딱 떼어서 동네에 팔고 한 40kg만 담자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동네 몇몇 아줌마들에게 얘기하자 대부분 이미 매실 엑기스를 담갔다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날짜가 좀 지나긴 지난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다 담그기로 하였다.

일단 매실을 한 소쿠리씩 씻어서 흐르는 물기를 뺀 다음 신문지에 펴 널었다. 그리고 선풍기를 틀었다. 65kg을 하루에 다 담자면 부지런히 씻어서 말려야 될 것 같아서였다. 매실 엑기스를 담글 통은 가지고 있는 유리병들은 용량이 적어서 그릇 집에 가서 한 통에 10kg은 무난히 들어가는 견고한 플라스틱통을 여러 개 사왔다.

설탕 또한 65kg을 담자면 65kg이 필요한데 설탕 65kg을 마트에서 사오는 일도 장난이 아니었다. 해서 우선 30kg만 사왔다. 1차로 넣고 난 다음 설탕이 다 녹아내리면 다시 한번 더 붓기로 하였다. 설탕 15kg짜리 두 포대를 수레에 싣고 끙끙대며 밀고 오니 아파트 상가의 아줌마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일을 벌여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았다. 그러나 되물릴 수 없기에 씩씩하게 수행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매실 엑기스 담그는 일이 신이 났는지 자신들도 일조를 하겠다며 들썩거렸다.

"그러면, 통을 하나씩 줄 테니 신문지에 널려 있는 매실을 통 가득 담아 줘."
"알았어, 엄마. 그런데 매실 담그는 것 너무 재미있다."
"재미있나? 엄마는 지금 너무 많은 양을 담그게 되어서 긴장된다."

아이들과 함께 매실을 플라스틱 통에다 다 담으니 여섯 통이었다. 그 다음은 설탕을 부을 차례였다. 설탕 포대를 뜯어서 매실이 가득 든 통들에 설탕을 부었다. 아이들에게도 손잡이 달린 컵 하나씩 쥐어주고 설탕을 부어 보라 하니 룰루랄라 신나 하였다.

매실과 매실 사이를 설탕이 자르르 흘러서 안착하였다. 그 모양을 보니 하루 온종일 매실에 매달린 피로가 씻은 듯이 갔다. 또 다 담아서 통에다 넣고 보니 65kg이 그다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달랑 5kg, 10kg씩 담는 이웃들이 적게 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담아 놓고 보니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 매실
담아 놓고 보니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 매실정명희
그렇게 매실을 담고 난 며칠 후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기, 매실 많이 담았다면서요?"
"예."

"우리도 담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
"그럼 한 통 가져가요. 통 값도 비싸니 통 값도 내고, 설탕 값은 서비스 호호."

"그게 아니고…."
"?"

"나중에 익으면 농축액만 줘요."
"뭣이라?"

"아, 우리는 통도 필요 없고 물 빠진 매실도 필요 없고 오로지 농축액만 필요하당께롱."
"후후, 알았어요."

이제 매실이 잘 익는 일만 남았다. 7월, 8월 지나 9월은 되어야 익을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려니 벌써부터 애간장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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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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