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수도, 혜린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5·18

[드라마 감상기] MBC 드라마 <제5공화국> '5·18 광주민주화운동'편

등록 2005.06.29 12:02수정 2005.06.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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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편이 끝났다. 5·18은 모두 5회에 걸쳐 250분 가량 다뤄졌는데 지금까지 5·18을 잘 다뤘다는 평가를 받은 드라마 <모래시계>가 2회 분량을 할애했던 데 비하면 꽤 많은 시간이다.

<모래시계>와 <제5공화국>의 닮은 점, 다른 점

a 드라마 <모래시계>

드라마 <모래시계> ⓒ SBS

<제5공화국>에서 5·18을 그렇게 길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직설 화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직설 화법은 <모래시계>와 <제5공화국>을 나누는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모래시계>는 은유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태수'라는 가상의 인물과 그 주변 사람들이 겪은 5월 광주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제5공화국>은 드라마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당시 현실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당시 계엄군에 맞섰던 윤상원, 박관현, 정동년 등의 인물이 그대로 등장했으며 5·18 광주를 둘러싼 신군부의 움직임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모래시계>에서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성명이 전부였다.

또 <모래시계>에서는 '태수'를 중심으로 극이 흘러 갔던 데 비해 <제5공화국>에서 비친 5·18에는 크게 도드라지는 인물 없이 그야말로 '시민'들이 전면에 나섰다. 운수업을 하던 창석과 동생 창수라는 인물에서부터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등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물론 조연급 연기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특정 배우가 강한 매력을 발휘할 여지는 그만큼 줄어 들었다. 대신 <모래시계>의 태수와 우석, 혜린이 가져갔던 영광은 시민군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졌다. 이는 5·18이 특별한 사람들의 역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라는 인식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는 데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여러 인물에게 극적인 긴장감이 분산되고 사건 또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나열되면서 시청자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94년 <모래시계>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면, <제5공화국>에서는 분노가 치밀었던 것도 사실성을 강조한 이러한 설정 때문이었다.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이나 당시 촬영된 흑백 동영상과 사진이 곁들여진 것, 88년 청문회 영상을 내보낸 것도 이를 극대화 시켰다.


보통 사람의 시선에서 그려낸 5·18

a 드라마 <제5공화국>

드라마 <제5공화국> ⓒ MBC

"총소리에 놀라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시위대와 한참 떨어져 있더군요.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습니다. 이제 제가 있던 자리로 못 돌아갈 것 같습니다."
-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윤상원의 말



<제5공화국>은 평범했던 광주 시민들이 어떻게 '투사'로 변해갔는지를 보여준다.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도 그런 인물이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등교를 저지 당한 전남대생 50여명이 시위를 벌일 때만 해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에 불과했다.

"비상계엄은 뭐고 전국확대는 또 뭐요?"라고 물을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그가 시민군 지도부가 되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수부대에 쫓겨 자신이 운영하는 운수공장으로 왔을 때 그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비상계엄이 엄한 시민들 때려 잡는 것"임을 알게 된 박남선은 시민군의 상황실장이 된다.

가상의 인물인 '창수'도 마찬가지다. 순진한 학생이었던 창수는 운수업을 하던 형 창석이 죽자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 대열에 합류한다. 형 창석 또한 "대한민국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쏠 리 없다"고 굳게 믿던, 순박한 사람이었다. 형의 죽음과 헌혈하러 병원에 왔다가 얼마 뒤 시체로 돌아온 여고생을 목격한 창수는 결국 시민군에 가담하고 도청에서 최후를 맞는다.

80년 광주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제5공화국>은 80년 당시 광주 사람들이 느꼈던 고립감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보여 주었다.

"그런데 형, 왜 아무도 안 오지? 지금쯤은 우리가 얼마나 당했는지 아는 사람이 생겼을 텐데... 왜 아무도 안 오지?"(창수)
"오겄지. 아, 너 같으면 부산이나 대전서 이런 일이 생겼다 그러면 안 가 보겄냐?"(박남선)


"전두환이 광주를 그냥 내버려 둘까"(윤상원)
"이제 온 국민이 알 텐데..."(정상용)


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신군부에 대항해 광주를 도울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언론 통제 정책에 의해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철저히 감춰지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고 믿었던 국가에 의해 배신 당하고 죽어간다.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시민군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죽은자의 몸에 태극기를 덮어줬다. 그리고 21일 낮 1시 공수부대가 시민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할 때 신호음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그들이 목 놓아 부르던 '애국가'였다.

드라마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창석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의식을 잃어 가는 장면을 공들여 내보냈다. "대한민국 군인이 국민들에게 절대 총을 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총에 맞은 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거리를 배회한다. 슬픔이나 분노, 고통,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월 광주의 공수여단... 그들에게 무슨 일이

a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시민들을 제압하고 있는 공수부대.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시민들을 제압하고 있는 공수부대. ⓒ MBC

<제5공화국> '5·18 광주민주화운동'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광주 진압에 투입됐된 11공수여단의 이영재 중사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철저한 군인이었던 그는 광주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는 군인이고 놈들은 적이야"라는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시위대 앞에서도 단 두 명의 인원으로 버틸 만큼 그는 강인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5월 19일 새벽 2시 30분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이영재 중사는 상관에게 강력히 반발한다. "그래도 잠은 좀 재워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상태로 출동하면 쟤들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이 중사는 시민군의 총에 맞고 죽어 간다.

드라마는 막다른 길에서 마주친 시민군과 공수부대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그 당시 11공수여단은 극심한 충정훈련과 잦은 이동으로 취침과 식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공수부대원들의 가슴 속엔 시위군중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했고 그것을 누군가에게는 풀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수부대를 보내 시위를 진압하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판단착오였다."

정치드라마는 그 속성상 역사의 몇몇 국면을 좌우했던 정치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그들이 극을 좌우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 속에서도 무명씨의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를 보는 것은 참으로 드물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제5공화국>의 5·18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을 보여주었다. 비록 투박하고 거친 화법이었지만 5·18을 다룬 이 드라마가 의미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나는 5공화국의 대미를 장식할 6·10이 어떤 식으로 그려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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