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광장에 서다'의 저자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오마이뉴스 권우성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이라고 부제를 달았다. 민중의 피와 땀과 눈물로 헤쳐 온, 이 나라 민주화의 길을 기록한 <진실, 광장에 서다>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김정남씨는 서문을 대신해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는 민주화운동 현장에 가면 으레 들을 수 있었고, 듣는 순간 듣는 이의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며 때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했고, 때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다지게 했던 촉매제였었다.
아무리 그런 시였다 할지라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그는 왜 그 시를 다시 떠올릴까?
‘긴급조치 시대 → 국가보안법 시대 → 집시법 시대’를 거치면서 “30년의 세월을 기다려” 이루어낸 ‘먼 옛날’이 아닌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고 또 절규하던 민주화운동 시절’을 너무 빨리 잊고, 기록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요 길을 내준 것도 아닌데, 우리 민중이 스스로 길을 찾고 길을 내며 험한 수풀 헤치고 걸어온 길이 곧 민주화 30년”이라며 “그것은 길고도 먼 길이었으며, 동시에 장한 길이었다”고 민주화운동 시절을 회고했다.
“미진하고 거칠지만 엉성한 밑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불과 10~20년 안팎이 지난 일인데 그때를 너무 쉽게 잊는 것 같아 기억을 되살리고, 당시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기록함으로써 후세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애초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 대한 기록을 직접 할 생각은 아니었다. 주변의 성화가 대단해 누군가가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옆에서 열심히 증언해주고 도와줄 약속을 얹어 평소 알고 지내던 가톨릭잡지 <생활성서>의 송향숙 수녀에게 필자를 찾아 연재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그의 제안을 받은 <생활성서>는 그러나 적당한 필자를 구하지 못했고, 그 제안은 ‘최적임자’인 그가 써야한다는 협박(?)이 되어 그에게로 되돌려졌다. 그래서 그는 1999년 2월부터 2004년 8월까지 무려 5년 반 동안 장기간 연재를 하게 된다.
지금도 육필로 원고를 쓰는 그는 연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매월 정성껏 쓴 원고와 간단한 편지를 함께 넣어 우편으로 잡지사에 보냈던 그는 연재 중 단 한번 예정에 없던 주제를 선택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2003년 6월로 기억하는데, 당시 고영구 변호사가 국정원장에 내정되자, 야당의 여러 가지 공격거리 중 1986년에 있었던 인천사태로 수배된 이부영 전 의원을 숨겨주었던 것까지 회자되었던 것. 그래서 그는 인천사태에 대해 순서를 앞당겨 썼었다고 했다.
시대를 씨줄로, 경험을 날줄로 삼아 쓴 육필
<생활성서>의 연재물을 엮은 이 책을 펼치면 차례에서부터 전태일·김상진·김지하·리영희·윤보선·오원춘·박종철……등과 같은 이름과 3.1구국선언사건·함평고구마사건·광주민주화운동·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부천서성고문사건·인천사태·6월항쟁……등과 같은 사건들을 만난다.
5·16 군사 쿠데타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일어났던 크고 작은 민주화운동들이, 언론에 보도된 기사,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증언, 시위에서 외친 구호, 성명서와 선언문, 재판 관련 기록(상고, 항소이유서, 최후변론, 모두진술 등) 등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 그 시대를 씨줄로, 경험을 날줄로 삼아 기록된다.
특히 이 책에는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조작 폭로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동자 김현장의 자수에 얽힌 뒷이야기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들이 공개된다.
“제가 수배되어 도망 다니고 있었는데, 함께 도망 다니다 헤어진 교도관 전병용씨로부터 ‘우촌 보게’로 시작되는 이부영의 ‘비둘기 편지’ 두서너 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었습니다.”
인천사태로 수배 중이던 이부영이 우촌(김정남의 아호)을 몰래 만나다 잡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들도 함께 수감되어 있었던 것. 그런데 이 고문경관들이 가족면회 때 자기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부영이 기자 출신다운 능력을 발휘하여 감옥 안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여 김정남에게 ‘비둘기 편지’를 띄웠던 것.
“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 이부영 등 알려진 이름도 있지만 이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고영구 변호사와 그 부인, 딸 등 일가족 모두와 전병용씨 그리고 아직도 현직에 있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박종철 사건은 조작된 채로 은폐될 뻔했습니다.”
비둘기 편지를 전해준 주인공인, 교도관 전병용이 있었기에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가능했던 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즉각적인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촌음을 다투는 위급함에 직면한 김지하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재판부기피신청과 모두진술권’의 아이디어를 짜내던 일 등등, 이 책에는 당시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냈던 일들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민주화는 ‘나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되찾는 일
▲'진실, 광장에 서다'의 저자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오마이뉴스 권우성
김정남씨는 민주화운동에 관해 기록하면서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엄혹했던 시절 탄압이 상상보다 얼마나 심했느냐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게 됐다고 했다.
극악의 조건 속에서도 투쟁을 이끌어낸 이런 사건들은 극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민주화를 위한 진보의 수레바퀴를 돌렸고, 결국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임계점에 도달하여 폭발한 것이 바로 6월항쟁이었다고 김정남씨는 말한다.
“단재 선생님께서 민족의 역사를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고 설파하셨는데, ‘나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곧 올바른 민족의 역사라는 교훈을 주셨지요.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는 민족·민주·통일을 추구하는 ‘나’와 반민족·반민주·반민중·반통일의 편에 선 ‘나 아닌 것’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고, 그런 한국 민주화의 역사는 투쟁을 통해 ‘나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되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정남씨는 ‘임금님귀는 당나귀 귀’라고 사실을 사실대로 외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겠느냐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양심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회, 할 말 하며 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민주주의 사회였다고 했다.
“할 말을 했기 때문에 진실을 외쳤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난과 희생을 겪었나요. 그런 점에서 민주화 30년의 여정은 ‘말’을 찾아 나선 도정이기도 합니다.”
김정남씨는 민주화 운동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현대사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인류평화와 세계 진보에 기여해야 할 우리의 능력과 창의를 내전으로 소진시키는 치명상을 입었다고 했다.
YS의 집권이 30년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부족했고, DJ 역시 국민통합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으나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출범은 민주화의 결과였을 뿐 민주화의 자랑스런 결실도 민주화의 완성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김정남씨는 또 YS와 DJ의 자기 한계와 정략 때문에 그 누구도 민주화가 민족사의 정통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고 했다.
“조국의 현실을 끌어안고 한번쯤 울어본 적이 없는, 반민주독재 반민중특권의 편에 섰던 너희들이 과연 조국의 현실을, 공동체의 내일을 얘기할 자격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향후 몇 년간이 우리 민족이 웅비, 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갈림길에 섰다며 그는 이제 좌우 구분은 무의미하다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건강한 실용적 구국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박노해의 말처럼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 곧 혁명의 시작이며, 인간만이 희망이다”고 생각하는 그는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진 않지만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책을 좀 더 쓰고,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담은 수상록이나 명상록 하나쯤 써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를 경세가라고 말하는 김정남씨는 인터뷰를 갈무리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사회와 국민의 존경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존경은커녕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을 때의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초심을 지킬 수 있다면 어찌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자성하고 또 자성할 일입니다.”
| | 김정남은 누구인가 | | | | “해위 윤보선의 뒤에 있었다. 김영삼의 뒤에도, 이돈명·홍성우 변호사의 뒤에도, 함세웅 신부의 뒤에도, 창작과비평사에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에도 항상 있었다.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항상 있었다.”
고은이 <만인보>에서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정남을 묘사한 부분이다.
1964년 6·3사태 때 배후 인물로 구속된 이래 그는 30여 년 동안 민주화운동의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회복국민회의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결성과 활동, 양심선언운동의 제창,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 및 폭로, 김지하 양심선언 발표, 보도지침 폭로 등을 주도했던 ‘재야의 거물’이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발표된 각종 성명서와 구속 인사들의 변론서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그는 명문장가로 통했다. YS가 목숨을 걸고 벌였다는 단식 성명서가 가장 기억에 남고, YS의 대통령 취임사가 가장 명문이라고 여기는 그는 최근 송두율 교수 변론서를 쓰기도 했다.
재야에서는 ‘윤 신부’(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였던 윤형중 신부 뒤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호칭), 가톨릭에서는 마지막 이름자를 따서 ‘남 선생’으로 불린 그는 청와대 재임시절 주무 수석으로서 일본의 옛 총독부 건물을 허물었던 것은 지금도 잘한 일로 기억한다.
청와대 수석 시절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대상이기도 했던 그는 6·29 이후 <평화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 사색>과 이태의 <남부군>을 기획하였고, <전태일 평전> 일본어판 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 조성일 기자 | | | | |
진실, 광장에 서다 -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김정남 지음,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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