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물려줄 아버지의 유산은?

[책으로 읽는 세상 11] 알렉상드르 자르댕의 <쥐비알>

등록 2005.06.29 12:54수정 2005.06.2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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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는 가족 중에서 가장 늦게 이해되는 사람이다. 애비는 굴욕을 물려준 종이거나(서정주의 경우),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할 치욕을 물려준 '씹새끼'이거나(이성복의 경우),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져 가난을 물려준 병든 가장으로(기형도의 경우) 자주 기억된다.


이렇듯 우리 마음 속에 부정적인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자리는 그리운 어머니의 드넓은 자리와 비교해 볼 때 초라하고 궁색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러한 보잘것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사실은 우리를 지탱해 준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이니 말이다. 스스로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벌써 희미해져 있다.

뒤늦은 후회와 깊은 슬픔이 목에 차 오르지만 우리는 그저 목멘 소리로 '아버지'라고 한 번 부르다 말 뿐이다. 굽신거리는 종이라도 좋고, 치욕스러운 씹새끼여도 좋고, 병든 가장이라도 좋으니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을 다시 떠올려보려고 노력해보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은 너무나 희미해서 오히려 슬픔만 더할 뿐이다.

아버지는 항상 말없이 뒤에서 우리를 바라다보고 서 있었기에 그 얼굴조차 희미해져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란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 되어 우리 아이들에게는 내 모습이 나중에 어떻게 기억될까 하는 데 문득 생각이 미친다.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선명한 기억으로 그들의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인가.

2.


책 표지
책 표지동문선
알렉상드르 자르댕의 <쥐비알>을 읽으면서 내가 감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즉, 그는 아버지 파스칼 자르댕이 죽고 17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많은 추억들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사상과 꿈이 너무나도 뚜렷하고 매혹적이어서, 아직 어렸던 그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소 과장이 느껴지는 서두로 시작하고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나는 현실에 매력을 잃어버렸다. 당시 나는 열 다섯 살이었는데, 이제야 그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것 같다. 좋은 책 속에 빠져들 듯 삶을 자극적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나를 삶에 밀착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내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하나의 축제였다.

짐짓 경박한 체할 때조차도, 아니 그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누리는 데 몰두했던 아버지는 부산스러운 일상의 활주로 위로 나를 줄곧 끌고 다녔다. 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자신을 완벽히 표현하고, 자신의 진실을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은 지상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모순투성이인 자기 본성을 단 1그램 잘라낸다는 생각만으로도 새파랗게 질렸으리라. 기상천외한 생각으로 가득 찬 그의 커다란 두개골 속에서 극도로 상반된 욕망들이 생겨나 익어가고 있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9쪽)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을 축제의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다니!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자르댕이라는 성(姓)뿐만 아니라 열 다섯 살까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축제의 삶 그 자체였다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그런 막대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나는 알렉상드르 자르댕이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열 다섯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을 서른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그의 고백이 어느 정도는 소설가다운 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책장을 한 쪽씩 넘겨 가면서 나는 서두에 밝혀놓은 이러한 그의 고백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와 아버지와 나눈 대화까지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해내 들려주고 있는 그의 이야기들은 과연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를 느끼게 해주었다.

<쥐비알>의 저자 알렉상드르 자르댕은 세월이 많이 흘러 스스로에게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충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모습에서 다시 발견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이란 얼마나 정답고도 눈물겨운 것인가!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의 모음이 아니라 재회의 책이라고 말한다. 그 재회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음 글처럼 이제 아버지가 된 아들의 기억 속이다. 그 기억에 힘입어 그 역시 이제 한 사람의 아버지로 거듭 태어난다.

"20년 전이었지요. 아빠와 저는 함께 노르망디 지방의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제게 자신의 삶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웃고 있는 우리로부터 몇 미터 떨어져서 여자 친구 하나와 함께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시선이 우리 두 사람에게 머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뒷짐을 지며 아빠의 거동을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이지 아빠와 똑같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엄마가 저에게 웃어 보이더군요. 엄마의 눈빛은 우리가 꼭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친 아빠 역시 그날 아침 제가 당신을 꼭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듯했습니다. 그 사실에 감동한 아빠는 제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지요. 무슨 말인가 했다면 그 아름다운 침묵은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노르망디 지방의 그 하늘 아래서 아빠는 더 이상 쥐비알이 아니라 제 아빠였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아빠를 사랑했던 것처럼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아주 멋진 일이 되리라고 말입니다." (211∼212쪽)


책을 덮으며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내 기억 속에 가끔씩 떠오르곤 했던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물려준 것이 비록 성(姓)과 가난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밖에는 없을지라도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터이고 또한 내 딸아이에게 물려줄 아버지의 유산을 만드는 길이 될 것이기에.

3.

이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쥐비알>은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 묘사된 아버지 파스칼 자르댕의 삶의 방식과 철학은 너무나도 '프랑스적'이라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해야겠다.

마치 카사노바에 돈키호테를 섞어놓은 듯한 그의 모습은 분명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 아버지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단지 우리는 마흔이 되어서도 스무 살처럼 살아가는 충만한 젊음과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는 태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모험심 등을 파스칼 자르댕으로부터 배워야 하리라. 그리고 나는 아버지로서 과연 어떤 유산을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덧붙이는 글 | <쥐비알>

ㅇ지은이 : 알렉상드르 자르댕
ㅇ옮긴이 : 김남주
ㅇ펴낸곳 : 동문선
ㅇ펴낸때 : 2002년 3월 20일 초판

덧붙이는 글 <쥐비알>

ㅇ지은이 : 알렉상드르 자르댕
ㅇ옮긴이 : 김남주
ㅇ펴낸곳 : 동문선
ㅇ펴낸때 : 2002년 3월 20일 초판

쥐비알

알렉상드르 자르댕 지음, 김남주 옮김,
동문선,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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