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속 혼자 봐, 말아"

수작을 걸어온 영화관 직원

등록 2005.06.29 18:12수정 2005.06.3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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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특별히 튀는 것도, 특별히 처질 것도 없는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낸 나를 주위 사람들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아마도 '뭐든지 혼자서 하기'일 것이다.


귀밑 3cm 단발머리에 흰색과 검정만이 교복 색의 전부였던 여고시절, 하다못해 화장실도 친구 손을 꼭 잡고 함께 다녀야만 안심이 되었던 사춘기 여고생에 비하면 내 행적은 좀 파격적이긴 했다. '학교 도서관 놔두고 시립도서관 가기' '시내버스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기' '야간자습 빼먹고 영화보기' 등은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내 기억 속의 보물들이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운 후 아직도 깜깜한 골목길을 나선 순간 느꼈던 알싸한 새벽공기, 보문산까지 걸으며 만났던 부지런한 사람들, 소녀의 기도를 울리며 지나가던 청소차, 무엇보다도 가슴 속 깊은 감동은 내가 지금 깨어 이 모든 것과 느낌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 헤매기'의 정점은 혼자서 떠난 고3 여름방학의 호남선 기차 여행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를 맴도는 성적, 세상에 나 혼자 내버려진 듯한 고립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고비를 탈출하지 않고는 남은 고3을 보내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래서 조금 더 용감할 수 있었나 보다. 정읍을 택한 것은 이미 교과서에서 배운 정읍사의 영향이었다. 혼자만의 여행임을 숨기려 일행이 있는 척한 기차 안의 불안했지만 스릴만점인 시간들.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용기를 냈다한들 단발머리 표시 나는 고3 여학생이 타지에서 낼 수 있는 용기의 양만큼 발을 내디딘, 내장산 매표소에도 미치지도 못한 여행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홀로 도의 경계를 넘은 뿌듯한 나만의 비밀은 모범생과 문제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도 쏠릴 수 있었던 그 시절 날 지키는 책임감 내지는 자만심으로 변해 있었다. 모범생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문제아들 입장에서는 '새발의 피'도 안 되는 '나홀로 했던 모든 짓'은 막막했던 고3을 무사히 견디게 했던 단비 같았던 나만의 일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학력고사에 대한 압박감은 모든 내 행동을 '홀로 영화보기'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기간이 촉박한들 영화보기는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마지막 내 숨통이었다. 영화음악이 인상적이었던 <콰이강의 다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후 배우로는 처음으로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는 브룩쉴즈의 <엔드리스 러브>는 학력고사가 채 1달도 남지 않는 기간에 본 영화였다.

일부러 혼자만을 고집하는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맞는 파트너가 있으면 자연스레 함께,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굳이 파트너가 없더라도 홀로 영화관에 가는 것은 그 후 내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10여년 동안은 내가 영화를 좋아 했었는지도 기억이 까마득할 만큼 영화관을 찾는 일이 뜸해졌다. 여행, 쇼핑과 달리 아이를 들쳐 없고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없는 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라야 애니메이션 우리말 더빙판 정도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대는 아이와의 극장행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고행이었다. 단 하루만의 온전한 자유, 아니 단 몇 시간의 내 시간이 절실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내가 아이를 키우며 문화적 갈망에 목말라하고 있는 동안 영화관도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멀티플렉스를 표방한 골라 보는 재미가 만점인 영화관이 집 주위에 넘쳐났고, 서울의 동쪽 끝 변두리에 자리 잡은 C극장은 어지간한 주말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준비된 표로 이미 내 전용관이 되어 있었다.

매회 스무 명 남짓한 관객, 앉고 싶은 자리에 푹 파묻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스크린에 몰입했을 때의 정신적 포만감. 혹 적자 경영으로 문을 닫을까봐 아예 그곳 세일즈맨처럼 그곳을 주위에 홍보하고 관객을 적극 유치했다.

영화관 직원 “노는 날인데, 영화 같이 보러가자”

a 2005년 6월 2일 10시 40분. 현재시간 관객은 달랑 나 혼자뿐.

2005년 6월 2일 10시 40분. 현재시간 관객은 달랑 나 혼자뿐. ⓒ 이승열

그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중문화 개방 후 처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나오는데 표를 받는 직원이 우리를 불렀다. 관객 명부에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고 가면 할인권 또는 무료 관람권을 보내준다고 했다.

며칠 뒤 C 영화관의 그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오늘 노는 날인데 마침 같은 지역의 H 극장표가 있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황당하고 분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이 땅의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숱한 비난도 생각났다.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뭔가 여자가 틈을 줬겠지. 괜히 그랬겠어?' 즉각 자아비판, 자기검열에 들어갔다. 며칠을 끙끙거리다 또 다른 '나 홀로 영화광 E'에게 내 황당함을 고백했다.

그녀 또한 나와 똑 같은 경험을 진즉 했었다. 워낙 돋보이는 외모로 뭇 남성들의 가슴을 흔들었던 E에게는 지나가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 꽃다운 20대에도 변변한 프러포즈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는 내겐 엄청난 모욕이요, 상처였다. 나뿐만이 아닌 나 홀로 영화객들에게 모두 했을지도 모를 상습적인 그만의 취미생활이었던 같다. 그러다 걸려들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그 후 되도록 혼자 영화 보는 일을 삼가하고 있지만 10분 거리의 나만의 전용관인 C영화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영화친구가 시애틀로, 파리로 떠난 겨울 결국 홀로 영화관을 향했다. 허리에 힘을 주고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표를 내고 자리를 잡고 나니 그 큰 영화관에 관객이 달랑 나 한 사람뿐이었다.

a 스타워즈 에피소드3 인터넷 예매권. '오늘도 즐거운 영화관람 되세요^^' 라고?

스타워즈 에피소드3 인터넷 예매권. '오늘도 즐거운 영화관람 되세요^^' 라고? ⓒ 이승열

아침시간이라 제대로 난방조차 되지 않은 찬 공기와 혼자라는 공포감이 온 몸을 덜덜 떨게 했다. 비상구 가장 가까운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초긴장 상태에서 본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흐르고 겨우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앞좌석에 파묻혀 영화를 보던 관객이 벌떡 일어났을 때의 모골 송연함.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짜식, 기침이라도 하지. 관객이 또 있는 줄 알았으면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제대로 볼 수 있었잖아.

얼마 전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스타워즈를 보러 역시 혼자 영화관을 향했다. 세상에 관객이 또 나 하나뿐이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표를 물릴 수도 영화를 볼 수도 없는 진퇴양난. 50대 여성 셋이 늦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열두 개의 프로 중 스타워즈를 선택하길.

그녀들이 그 많은 자리를 다 남겨두고 내 옆으로 왔다. 부스럭 과자봉지 뜯는 소리, 영화평을 주고받는 소리, 차라리 덜덜 떨더라도, 또 다시 이상한 지분거림을 당하더라도 나 혼자인 게 나을까?

나는 오늘도 인터넷을 검색하며 홀로 조조영화를 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조조할인 500원, 통신사 할인 2000원, 신용카드할인 1500원에 수수료가 500원.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3500원으로 느끼는 이 행복감을 가끔씩 발견되는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정녕 포기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 <극장전> 공모기

덧붙이는 글 <극장전> 공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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