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대가 특이한가? 그건 상상의 연필 때문"

[해외리포트] 리투아니아 연극의 대부,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

등록 2005.06.29 19:17수정 2005.07.02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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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스카라스의 연극이 자주 오르는 리투아니아 국립 드라마 극장 입구

오스카라스의 연극이 자주 오르는 리투아니아 국립 드라마 극장 입구 ⓒ 서진석

한국에서는 비행기 연결 편을 조회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낯선 나라 리투아니아. 그 리투아니아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것들을 기억한다. 세계적인 프로농구, 아름다운 노래와 민속춤,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의 연극.

밀티니스, 투미나스, 네크로슈스 등 모스크바나 구 레닌그라드에서 수학한 연출가들에 의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리투아니아의 연극은 또 다른 신세대 연출가들에 의해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Oskaras Korsunovas)다. 그가 직접 단장을 맡고 있는 OKT(Oskaro Korsunovo Teatras,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 극단)는 지난 5월 서울 LG 아트홀에서 독특한 분위기의 '리투아니아 식'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에 올려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런 세계적인 명성의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를 만나는 것은 생각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 해외공연이 없어 빌뉴스에 있었고, 나의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코르슈노바스의 갑작스런 일정 때문에 인터뷰가 4시간가량 지연되긴 했지만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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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석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는 2차대전 후 리투아니아 최초로 설립된 연출학교에서 공부한 리투아니아 연출 2세대다. 리투아니아에 연출학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소련의 검열로 인해 리투아니아 내에서 연출을 공부하는 게 불가능했다. 연출을 공부하고 싶으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로 가야 했던 것.

밀티니스 같은 리투아니아 연극 1세대들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는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연출을 공부한 최초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90년에 입학했는데 당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등으로 화해분위기가 조성됐을 때다. 또 이듬해에는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코르슈노바스는 90년대 카우나스(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에서 활동한 요나스 바이트쿠나스에게 연극을 배웠다. 요나스 바이트쿠나스는 개혁적 연출로 리투아니아 연극사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1969년 수도 빌뉴스에서 태어났다. 당초 그는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서 연출학교에 진학했지만 연출을 공부하면서 연극에 빠져들었다. 1학년 때부터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2학년이 되자 리투아니아 국립드라마극장의 조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연극 연출이냐고?

"나는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았다. 손에 연필을 들고 누워서 여러 가지 공상을 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서 여러 이야기도 만들어내고 상상 속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연필이 아니더라도 손에 뭔가를 쥐면 비슷한 짓을 하곤 했다. 나는 그게 좋았는데 부모님들은 누워서 이상한 짓을 하는 나를 보고 놀라 야단을 친 적도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연출할 때 그런 어린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 그의 작품에서 배우들의 동작은 최소화되고 고도의 상징이 많이 사용된다.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한 배우들은 모두 나무판을 들고 연기한다. 그가 연필을 쥐고 상상했던 것처럼 연극무대에서 나무판을 갖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연극의 본질은 상상에 있다고 본다. 20평방미터의 연극무대 속에서 기적의 연필을 가지고 관중의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거다. 그런 차원에서는 연극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다양하다.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코르슈노바스가 어린시절에 최초로 접한 연극에 대한 느낌은 아주 색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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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석

"내가 최초로 연극을 접한 것은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그건 내가 당시 겪은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내 눈 앞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실제인지 아닌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대에 등장한 늑대가 진짜 늑대인지, 마녀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이 악몽이 정말로 끝이 나는 것인지... 모든 것이 실제처럼 느껴져서 아주 겁이 났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는 작품은 싫다"

코르슈노바스가 작품을 고를 때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은 단 하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고 동일하게 이해하는 상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배제하는 것. 그는 "연극은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연극은 단어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고,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며, 콘서트보다 더 많은 것을 들려줄 수가 있다는 것.

그는 고전을 연출하면서도 현대적인 분위기로 연출하고자 노력하고, 현대작품은 고전처럼 연출하려고 노력한다. 고전을 통해 현대적인 측면을 찾아내고, 현대작품을 통해 언제나 존재해왔던 일반적인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그는 독일극작가 마엔부르그의 <불의 얼굴>이란 작품을 연출하면서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무대에서 미친 듯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몸짓과 뜻 모를 소음, 무용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동작 등 지금까지 본 것과 다른 색다른 형태의 연출법에 대해 의아해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다. 이런 의견에 대해 그는 어떻게 볼까.

"내가 연극을 본 뒤에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는 인상들은 전부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장면들이었다. 그것을 본 후 항상 생각하고 분석하곤 했었는데 그런 것을 통해 연극에 등장하는 동작과 상징, 주변 인물들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이 꼭 바로 이해할 만한 것일 필요는 없다. 관중들에게 강한 인상과 상징을 전달하고 작품이 끝난 뒤에 관중들이 그것을 고민할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특성은 다양한 현상의 공존이라고 본다. 이 세상은 한 가지 현상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런 다양한 움직임과 분위기는 연출하는 과정 중에 만들어진다. 연출가의 머리로 미리 생각해내는 게 아니라, 작가와 배우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공동으로 작업한다. 그는 즉흥적으로, 가끔은 우연히 이리 저리 연습을 하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스쳐지나간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잡아내고는 자신의 작품에 인용한다.

"한국음식과 소주가 좋다, 리투아니아에서도 한국연극 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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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석

다른 나라에서는 작가나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리투아니아에서는 연출가의 위치가 더 크다. 밀티니스, 베이트쿠스, 네크로슈스 같은 1세대 연출가들은 독특한 철학적 세계의 작품을 연출했고, 관객들은 연출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연극을 관람한다.

"그래서 실력 있는 연출가들은 새로운 해석을 자주 한다. 좋은 현상이다. 요즘 연극이 텍스트를 중시하고 단순한 내용전달에 치중하는 '문학적 연극 추세'로 가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연출을 싫어한다. 나는 말하는 연극이 되길 원한다. 그래서 고전을 자주 올리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다. 연극은 언제가 이전에 말하던 것을 또다시 반복해서 이야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오스카라스 크로슈노바스 같은 연출의 대가들을 통해 현재 리투아니아 연극은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고 있지만 해결해야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연극 시스템과 행정적 차원이다. 현재 리투아니아 연극시스템은 구 소련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그는 한국에서 공연할 당시 무대 규모나 시설 면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애석한 점은 그가 연출하는 작품 거의 모두가 러시아나 서유럽의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연출가의 개인적인 취향이라기보다 독립 전까지 소련의 검열로 인해 리투아니아인들의 사상이 담긴 희곡을 창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재 몇몇 재능 있는 리투아니아 작가들이 독특한 작품을 완성해 조금씩 리투아니아 연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다.

오스카라스 크로슈노바스. 그는 이미 한국을 두 차례 다녀갔다. "관용적이고 문화적인 사람들이 많고, 그리고 한국음식과 소주가 아주 좋았다"는 게 그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다. 그는 또 한국영화를 리투아니아에서 접할 기회는 많지만 한국 연극을 접할 기회는 전무하다며 섭섭함을 표하기도 했다. 세계적 수준의 리투아니아 연극과 한국 연극이 적극적으로 교류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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