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쓰고 보낸 아빠의 문자메시지

얼마 전 아빠가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등록 2005.06.30 09:16수정 2005.06.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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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도서관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습니다.


"아빠 앞산에 올라간다 오늘 휴는날(쉬는 날) 밥먹고 바로 가니 헉헉 숨이 찬다"

a 아빠의 문자메시지

아빠의 문자메시지 ⓒ 이선미

짧게 보낸 이 문자를 보니 괜히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마도 산에 올라가는 중턱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요즘 부쩍 어두워진 눈으로 찡그리면서 이 문자를 보냈겠지요. 글자 하나 만드는데 좀 오래 걸리고, 오타가 나서 다시 지우고 그러다가 그냥 포기해서 있는 그대로 보내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아빠의 문자 메시지는 지난 2~3주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미야 학자금은 입금했니 아빠 문자 배었다(배웠다)"

그리고 아빠가 보낸 회신번호에는 아빠 전화번호랑 내 전화번호랑 두 개가 한꺼번에 길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자메시지가 처음이라 많이 서툴렀습니다.


집에 가서 어떻게 문자를 배웠냐고 하니 엄마가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휴대폰 버튼을 느리게 꾹꾹 누릅니다.

엄마한테 문자메시지 전수를 받아서 아빠는 요즘 다 큰 딸들에게 전화로는 하지 못하는 속 얘기를 꺼냅니다.


지난 주 문자는 "선미야 아빠 너무 힘이 들구나 산 넘어 산이고"였습니다.

요즘 문자 하나가 친구, 후배들끼리 무의미하게 이것저것 간단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는데, 아빠의 문자를 받고부터는 문자 착신음이 들리기만 하면 약간 긴장이 됩니다.

아빠의 문자는 진솔하지만 어둡습니다. 정답지만 슬픕니다.

다른 이들의 엄마, 아빠도 나이가 들면 그렇고, 자식마음도 다 그렇겠지요.

그런데도 저는 오늘 아침부터 아빠의 문자에 '맏딸로 뭐라도 해드려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요. 사실 이 생각이 힘이 들 때마다 저를 지탱해주고 독하게 만드는 기둥이기도 합니다.

지난달 아빠 생일에 집에 갔을 때입니다. 아빠는 회사 유니폼으로 입는 와이셔츠가 너무 조인다면서 다시 맞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돈을 얼마 건네 드렸지요. 아빠는 그 돈으로 와이셔츠는 사지 않고 모처럼 엄마랑 나를 소문난 냉면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시내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주 오는 커피숍에도 들어가 커피도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웃으면서 넘어가고, 견딜 줄 아는 분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돈은 없어도 사랑은 듬뿍 담긴 그런 집이었습니다. 오토바이 하나에 딸내미 둘을 태우고 이웃동네 다른 아파트 단지에만 파는 1000원짜리 3층짜리 케이크와 같은 아이스크림을 일주일에 한 번은 사주셨습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오실 때면 크림빵, 단팥빵, 소보루빵, 햄치즈빵을 왕창 사들고 오셔서 식탁에 와르르 쏟아내기도 했었지요. 그러면 우리는 잠결에 일어나 햄치즈빵만 홀랑 먹고 다시 잠에 들고는 했습니다.

그런 아빠가 요즘 약해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남몰래 우시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다 큰 자식이 아빠의 짐을 덜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 속이 상하네요. 동생과 같이 학자금 대출을 꾸준히 갚고는 있지만, 다른 빚들이 너무 많아 아빠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매번 아빠의 문자가 오면 제가 보내는 문자는 단 하나.

"아빠, 힘내세요. 저희가 있잖아요. 우리 한번 몇 년만 참아봐요."

아빠가 힘들다고 하면 제가 보낼 수 있는 문자는 이것 하나입니다.

나중에는 마음 짠한 문자만 오가는 것들이 아니라 정말 기쁜 소식이 넘쳐나서 문자를 마구 마구 보냈으면 합니다. 참, 기쁜 소식이라면 아빠는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하겠군요. 아빠의 밝은 목소리, 꺼이꺼이 넘어가면서 좋아서 웃는 그런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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