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212회

등록 2005.07.01 07:58수정 2005.07.0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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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의 삶에 있어서 지난 사흘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함이 있었고, 과거 만보각(萬寶閣)의 유명한 숙수(熟手)가 만들었다는 음식과 술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던 삶에서 잠시 비켜나와 이러한 풍요를 느끼는 것은 확실히 고마운 일이었다. 자로 잰 듯한 절제함을 버리고, 애써 피하려했던 나태함은 사흘이란 시간 속에서도 경각심조차 주지 않고 흘러 버렸다.


"어맛---!"

잠든 체 하고 있다 다가오는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밖에 나갈 일 없으니 얇은 나삼을 한 겹 걸친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이 느껴졌다. 아직까지 익숙지 않아 볼이 발그레해지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싫은 기색은 아니다. 까칠한 수염이 얼굴을 찔러도 그녀는 사내의 요구에 입술을 갖다댄다.

"음식이 식으면 맛이 없을 거예요."

그저 말 뿐이다. 하루 한 끼나 제대로 먹었는지 기억도 없다. 음식은 언제나 때가 되면 빈청에 차려졌다. 두 사람이 먹으면 먹는 대로, 손대지 않았으면 그냥 치우길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미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송가의 몰락서부터 큰 오빠의 방황과 자신이 천지회에 가입하게 된 사연, 그리고 놀랄만한 사부의 이야기, 자신의 마음…. 그녀에게도 그만큼 아픔이 있었다.


"나는 산속에서 쌀알 한 웅큼으로 하루를 보냈소. 이곳의 음식은 한 끼만 먹어도 이틀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맨살이 닿는 느낌은 너무나 좋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벌써 저녁이에요. 오늘 우리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요."

말은 그래도 그녀 역시 그에게 포갠 자신의 몸을 일으킬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녀 역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영원히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을 알기에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담천의는 그녀를 안았던 손을 풀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신 말대로 우리는 식사를 하는 편이 좋겠소."

누군가가 그 둘만의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매우 조용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음식을 가져오는 시비들의 발걸음과는 달랐다. 그의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챈 송하령이 몸을 일으켰다. 나삼 하나로는 감출 수 없었던지 그녀의 육봉이 눈을 자극했다. 그의 눈길을 받으며 그녀는 옆에 있던 옷을 골라 담천의가 입는 것을 도왔다.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둘만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남녀의 의지로 끝내기에는 그들은 너무 젊었고 너무나 상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송하령 역시 그것을 알았다.

"몽화예요. 들어가도 괜찮은가요?"

그녀였다.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고, 두 젊은 남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려 했다. 이미 자신이 만들어 준 자리였지만 두 사람이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담천의의 옷매무새를 바로 잡아 주고는 송하령은 배시시 웃었다.

"어서오세요."

두 사람은 침실을 나와 빈청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일각 전 가져다 놓은 음식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어느새 식었지만 그 향기만큼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두 사람의 코를 자극했다. 문이 열리며 몽화의 모습이 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혼자였다.

"식사를 하시려던 참인가요? 모자라지 않는다면 저 역시 같이 먹고 싶군요."

아무리 옷매무새를 다듬었다고는 하나 꼼꼼하게 다듬은 모습도 아니고, 이미 저녁을 가져다 놓은 지 일각이 지났음에도 수저를 든 일도 없었으니 자신이 오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옷을 걸치고 나왔음을 짐작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의 무안을 감춰주려 하는 것이다.

"좀 모자랄 것도 같지만 주인보고 먹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 객된 입장에서 어쩔 수 있겠소?"

그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고는 농처럼 말을 던진다. 송하령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리에 앉는 몽화 앞으로 수저를 놓았다.

"북경 쪽의 요리는 다른 지방보다 향기는 덜해도 재료 그 자체의 풍미를 느끼게 해주는 은은한 맛이 있어요."

"만보각의 숙수였다죠?"

송하령이 거들자 몽화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두 뺨의 불그레한 홍조는 아직 사랑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일 게다. 송하령을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이 지금까지 가려졌던 그녀의 미모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볼 때는 모르겠더니 두 번, 세 번 볼수록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만보각은 북경에서도 첫 번째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곳이에요. 저 역시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너무 비싼 곳이기도 하죠."

그녀는 정말 식사를 하지 않고 왔는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단지 두 사람과 식사를 하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담천의는 빈속을 어느 정도 채우자 입을 열었다.

"뭔가 소식이 있소?"

"있어요. 아주 놀랄만한 소식이죠."

몽화는 그가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입가의 음식 기름기를 찍어 내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찾는 우교란 자는 본명이 유동림(柳東林)이예요. 당신과 같은 강소(江蘇) 소주(蘇州)에서 출생. 나이는 현재 쉰하나. 살문인 살천문(殺天門) 출신으로 어떤 연유였는지 모르지만 담명장군을 호위했지요."

살천문은 주로 강남을 무대로 전설적인 죽음의 살문으로 존재한지 벌써 백년이 넘은 곳이다. 사실 살수집단으로 백년을 넘게 활동해 오기란 일반 문파가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 내려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사람을 죽이는 살수가 어떤 연유로 부친의 호위를 하였던 것일까?

"현재 어디에 있소?"

그의 다급한 물음에 몽화는 다시 차 한 모금을 느긋이 마신 후에 대답했다.

"살천문의 문주(門主)예요.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몽화는 아예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온 것은 그와 매우 중요하고 비밀스런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놀라운 말을 하면서도 차분했다.

"사실 그가 살천문의 문주라는 사실은 우연하게 알게 되었어요. 진작부터 대두자와 수조자의 내력을 캐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를 공격했던 대두자와 수조자가 살천문의 살수였단 말이오?"

경악스런 일이었다. 자신을 노린 그 자들이 살천문의 살수라는 결론이었다. 그들에게 살수의 냄새가 맡아졌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들이 갑작스럽게 왜 자신을 노린 것일까? 더구나 자신이 찾으려 했던 인물이 살천문의 문주라니….

그렇다면 우교, 그 자가 담가장의 혈사를 벌인 장본인이란 말인가? 살천문에도 분명 강중장군이 남겨 놓았던 천(天) 자가 들어가 있었다. 더구나 용화사의 흉수는 분명 살천문의 살수 들 임이 분명할 것이다.

"나로서도 아주 의외의 일이었죠.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됨으로 해서 나는 지금까지 가졌던 의문의 실마리를 조금씩 풀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담천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우교는 살천문 출신으로 부친을 호위했다. 헌데 호위하던 자가 담가장의 혈사가 있던 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현재까지 살아있고, 살천문의 문주가 되었다. 더구나 자신을 노린 자들이 살천문의 살수였다. 누가 생각해도 뻔히 해답이 나오는 일이었다.

"살천문은 어디에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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