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에서 꼽추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면, 에스메랄다의 가족이나 그를 연모하는 많은 이들은 콰지모도를 욕하고 돌팔매를 할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콰지모도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에스메랄다가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모종의 말 못할 음모에 걸려든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좀 낫다. 또한 에스메랄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콰지모도만이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한다면 콰지모도는 온갖 욕을 혼자 다 먹을 것이다. 미친 놈 소리를 들을 터다. 그러나 만약 멋진 경비대장 페뷔스 드 샤토페르가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가 욕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비록 말 못할 처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콰지모도가 관객에게는 선호될 수 있다. 관객이 콰지모도와 심정적 동일시를 이루면 말이다.
전인권은 슈렉? 콰지모도?
슈렉이라면 어떨까? 피오나 공주를 사랑하는 못생기고 힘만 센 괴물. 피오나 공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슈렉을 싫어하고 비난을 가할 것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맺어졌으면 한다. 그 이유는 슈렉과 관객 자신이 동일시를 이루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전인권은 동일시의 슈렉이 아니며 혐오스런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발끈할 여지가 많아 보인다. 그렇다고 혐오가 이번 일에서 본질 전체는 아니다.
전인권이 이은주를 사랑했고 이은주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에 인터넷 매체의 비아냥 기사와 사람들의 욕이 쏟아졌다. 맨 처음에는 단순한 욕에서부터 일종의 룰을 어기고 자신 생각만 하는 이기주의자로 비난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지경을 보는 비판가들은 전인권의 사랑 발언 사태를 두고 황색 저널리즘에 포획되어버린 낮은 인터넷 문화를 지적한다. 그런 단순 가십거리에 이렇게 흥분하는 모양새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해볼 점 한 가지는 있지 않을까. 단순한 가십거리는 아닐지라도 사랑 혹은 진실에 관해 우리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이성적,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처음부터 짚자면 전인권은 나이도 많고 외모도 그렇게 준수하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외모나 스타일에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젊은층 중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마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를 연상시킨다. 추한 콰지모도가 예쁘고 착한 에스메랄다를 사랑하고 에스메랄다도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에스메랄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러니 콰지모도에게 욕이 쏟아진다. 맨 처음에는 이런 수준인줄 알았다.
그러나 다른 생각에 들기도 한다. 너무 사랑에 대해 우리는 전략적이거나 계산적인 것은 아닌지, 사랑에 대한 일반적 대중 심리를 한 사람의 사랑에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어느새 원조교제나 직장 상사 성폭력이니 하는 왜곡된 남성 중심의 성문화 때문인지 나이 많은, 50대 중반의 남자가 20대의 젊은 여성을 사랑한다고 하면 욕을 먹는 게 태반이 되어버렸다. 격차가 난다고 세상에는 그렇게 부정적인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말이다. 더구나 그 여성이 대중의 인기를 받는 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문자메시지 공개 비난 적절한가
이런 사회 심리를 전인권이 몰랐을까? 또한 자신이 그렇게 계속 항변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그랬다면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다. 순수성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인권이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럴리 없다는 잣대를 이미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왜 문자메시지를 공개하는가'라며 비판한다. 그것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기지 말이다. 무엇보다 고인의 사적인 것을 공개하는 것은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혹은 욕보이지 말라는 이야기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가만 보면 공개는 전인권의 사랑 고백이 무수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항변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태의 증폭이 불러일으킨 것이지, 처음부터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계산적인 우리들은 문자메시지를 공개하며 항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불리한 일이고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한다면, 그것도 엄청난 대중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떨까? 사랑에 대해 의심이나 추궁을 당하는 것은 치욕이나 수치에 가깝다.
당연히 강하게 사랑의 진정성을 강변할 것이다. 하지만 신상을 위해서, 더구나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이들에게는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것을 강권하는 게 세상 인심이 되어 버렸다. 설혹 진정성이나 진실이 있더라도 말이다. 대부분 알아서 이 수준까지도 오지 않는 것이 룰이 되어버렸다. 사랑의 진정성을 지키는 게 오히려 우습고 욕을 먹을 일이 되었고 그렇게 하는 연예인은 바보다. 그렇다면 전인권은 바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여기에서 사랑의 유형도 여러 가지라는 점이다. 정신적인 교감의 사랑도 있고, 육체적인 끌림의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정신적인 교감이야 수많은 이들의 정신적인 사랑으로 맺어진다.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고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전인권과 이은주, 둘 사이의 육체적인 끌림으로만 오버했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육체적인 끌림을 연상할수록 고인을 더럽히지 말라는 극단적인 비난이 나올 테다. 실제로 그랬다. 이럴 때 정작 문제는 우리의 전인권을 향한 부정적 투사(projection)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전인권 주장이 무슨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자 메시지 등에서 볼 때 교감이 분명 있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진정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전인권은 어떠한 지경에 이를까? '룰을 지켜라! 자신 안에만 담고 있어라!'라는 이성적인 통제나 합리적인 선택만이 가능할까? 견디지 못해 어느 식으로든 표출했다고 그것을 호들갑스럽게 각 매체들이 활자화한 심리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전인권을 콰지모도에 비하고 백안시하는 사회 심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를 겨냥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매체의 의도는 적중했다.
한편으로 고인만을 위하고 그녀를 사랑한, 그녀가 사랑했을지 모르는, 살아있는 전인권의 마음은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닐까?
어느 새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 진실을 외치면, 사랑을 외치면 그 이면에 무슨 음모나 이해관계의 전략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는 경향이 당연해진 것은 아닐까? 앞뒤 생각 없이 누구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했다는 순수한 외침에 오히려 각종 전략적 계산을 통한 행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감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지. 연예인들에게만 작용하는 비극적인 이중감옥일 수도 있다. 이은주를 사랑하는 우리 자신은 자신대로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다만 전인권에 바랄 것은 그 사랑을 말로 항변하지 말고 음악으로 승화해서 대중들에게 선사해 달라는 점이다. 괴테나 스탕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이 격차를 무색하게 했던 사랑이 비극적 운명, 사회적 격차에 막혀 이루지 못하게 되자 작품으로 노래했듯이. 그 점이 아쉽다.
덧붙이는 글 | 고뉴스(gonews)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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