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이모가 제게 어머니입니다"

과테말라로 떠난 사촌오빠가 생각납니다

등록 2005.07.01 20:11수정 2005.07.0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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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드리운 하늘 한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듯 억수 같은 비가 한참 쏟아지더니 어느 한순간. 거짓말처럼 하늘이 말갛다. 그 말간 하늘 언저리 어디쯤. 어머니의 무심한 시선이 오래 멈춰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는 것도 모른 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은 것일까.


"엄마! 무슨 생각해?"
"장마가 시작 되었나 보구나. 이렇게 비가 오락가락 하니. 그나저나 너 오빠는 어쩌고 있는지…."

"오빠? 아! 잘 지내겠지. 왜 오빠 걱정돼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남의 나라 돈벌러 간 사람이 어떻게 잘 지내겠니. 오늘은 네 올케한테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등 뒤로 비를 잔뜩 담은 시커먼 먹구름이 발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과테말라… 과테말라… 한번쯤은 스쳐 들었겠지만, 그러나 지금까지는 나와 전혀 상관없던 나라였었다. 그러나 이젠 그 낯설었던 이름이 어느 순간 내 귓전을 스친다면 나는 아마도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그 먼 이국땅에 이젠 내가 아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사촌 오빠. 즉 이모의 아들이다.

중앙아메리카에 속해 있는 과테말라.
중앙아메리카에 속해 있는 과테말라.김정혜
오빠는 어머니에게도 또 내게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유복자로 세상에 태어나 참 지지리도 풀리지 않는 세월. 그 세월을 45년이나 살고 있는 오빠였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오빠는 정말 안타까울 만큼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노력과 성실 하나만이 자신의 재산이라 자부하며 운 없는 자신의 인생에 발목이 걸려 넘어져도 다시 또 벌떡 일어서기를 몇 번. 오빠는 꼭 오뚝이 같은 사람이었다.


홀어머니의 갈퀴 같은 손이 가슴 아프다며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어도 찢어지는 가난은 늘 함께했다. 그 와중에 둘째이모의 자궁암 발병은 오빠의 삶 그 자체를 좌절의 수렁에서 한참 허우적거리게 했다. 3년. 병마와 싸웠던 이모도 그 이모를 지켰던 오빠도 또 그들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도 다함께 너무 아픈 시간이었다.

이모를 묻고 돌아오던 길. 푹 꺼져버린 퀭한 눈으로 오빠는 내 어머니께 말했다.


"이젠 이모가 제게 어머니입니다."

10년 세월, 어머니에게 있어 오빠는 배 아파 낳은 아들 못지않았다. 참 다정하고 곰살가운 아들이었다. 명절에도, 어머니의 생신에도, 어버이날에도 오빠는 한 치 부족함 없는 천생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오빠가 어머니에게 있어 다정하고 곰살가운 아들이었다면 내게는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오빠였다. 단발머리 나풀거리던 소녀 적 한 때. 오빠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눈부신 우상이었다.

오빠의 우상이었던 이소룡
오빠의 우상이었던 이소룡김정혜
조각 같은 잘 생긴 얼굴과 듬직한 덩치에 어디서나 돋보이는 큰 키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의 가슴을 불태웠다. 거기다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었던 오빠가 이소룡 뺨치는 현란한 솜씨로 쌍절곤을 돌리던 그 모습이란….

그런 근사한 오빠를 두었다는 이유로 한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고 오빠와 한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일요일이면 우리 집은 언제나 친구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여름 밤. 훤한 달빛과 보석 같은 고운 별빛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그 여름 밤. 옥상에 오른 오빠가 쌍절곤을 휘둘러 대면, 시험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 다락방엔 모여 있던 친구들은 손바닥만한 창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너 한번 나 한번 그렇게 오빠의 근사한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때 친구들의 열망에 찬 그 눈빛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그 보석 같던 별빛만큼이나 초롱초롱 빛났었다.

어느 날. 소녀들의 짝사랑이 과격해졌다. 오빠의 방을 한번 훔쳐보자는 겁 없는 모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오빠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야간고등학생이었다.

아주 늦은 시간. 다락에서 무심히 오빠의 창을 내려다볼라치면 그때서야 오빠의 창에 불빛이 몇 번 깜빡깜빡 거린 후에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빠는 늘 그렇게 늦은 귀가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오빠의 사소한 일거수 일투족 하나라도 우리들에겐 최대의 관심사였기에 오빠의 늦은 귀가까지도 친구들에게 이야길 했고 그 말끝에 방과 후 오빠의 방을 훔쳐보자는 모의를 하게 됐다.

마침 주간고사로 인하여 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날, 우리는 도둑고양이처럼 오빠의 방을 침범했고 시도 때도 없이 소녀들의 여린 가슴을 요동치게 했던 그 주인공의 방에서 무단침입의 죄를 짓고 있음에도 철없는 소녀들은 황홀경에 요동치는 가슴과 설렘의 현기증으로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눈 속으로 또 가슴으로 담아두기엔 너무 아쉬웠던 것일까. 친구들의 손엔 오빠의 사진이 한 장씩 들려 있었다. 친구들은 가져온 오빠의 사진 위에 시를 적어 넣고 잘 말려놓은 꽃잎을 함께 붙여 코팅을 했다. 오빠의 얼굴은 친구들의 책받침에서도 볼 수 있었고 책갈피에서도 볼 수 있었고 벽걸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오빠가 이소룡 뺨치게 돌려 대던 쌍절곤
오빠가 이소룡 뺨치게 돌려 대던 쌍절곤김정혜
오빠의 방을 침범한 일로 친구들은 우상을 가까이 함에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한동안 나는 겁 없는 모의에 주동자라는 죄책감으로 오빠의 의심에 찬 시선을 피하느라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었다.

올해 오빠의 나이 마흔 다섯. 움푹 들어간 두 눈과 툭 튀어 나온 광대뼈로는 옛날 조각 같은 그 얼굴은 도저히 짐작조차 해볼 수가 없고 휙휙 바람 스치는 소리를 내며 신나게 쌍절곤을 돌려대던 오빠의 두 어깨엔 현실의 고달픔만이 무겁게 얹어져 있다.

이모의 암과 죽음. 잇따른 사업실패, 절친한 친구로부터 당한 사기. 그 세월을 지내면서 숨이라도 제대로 쉬었을까.

오빠의 직업은 재단사였다. 지금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의상실이란 간판이 즐비하던 한때는 꽤나 능력 있는 재단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상실 간판들이 거리에서 사라지면서 재단사라는 오빠의 직업도 냉대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빠는 다른 밥벌이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봉제공장을 차렸지만 그것조차도 번번이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게 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오빠에게 남겨주지 못했다.

과테말라로 떠나기 전. 오빠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왔었다.

"이모. 이번에 과테말라에 새로 생기는 의류회사에 취직이 되서 떠나게 됐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계세요."
"왜 하던 공장은 어쩌고?"

"접었습니다. 집사람과 밤낮없이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니…."
"그래. 네가 알아서 했겠지만 그래도 낯선 남의 나라가서 어떻게 견디려고…. 아니다. 내가 괜한 말을 하고 있구나. 오죽했으면 남의 나라까지 돈 벌러 갈 생각을 했을까. 그래 언제 오냐?"

"따로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만, 한살이라도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오래 걸리겠지요."


어머니와 오빠가 주고받는 가슴 저민 몇 마디가 너무 서러워 애써 웃음 지으며 내가 우스갯소리 한마디를 했다.

"길면 3년 짧으면 1년이라더니, 그런 거야?"

그러나 어머니와 오빠의 눈물 젖은 어설픈 그 웃음은 왜 나를 더욱 서럽게 만들고 있었는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어정쩡한 얼굴로 힘없이 손을 흔드는 오빠의 뒷모습은 어머니에게도 내게도 아픔으로 남겨지고, 그 아픔을 가슴에 묻으며 그저 몸 건강 하게 잘 지내기를 소원했음은 어머니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오늘같이 이렇게 비라도 퍼붓는 날이면 멀리 타국으로 떠나보낸 조카에 대한 아픔으로 어머니의 가슴에는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칠 것임을 시커먼 하늘 어디쯤에 무심히 머물고 있는 어머니의 시선으로 나는 알 것 같다.

어머니의 시선이 머물렀던 그곳에 오래 전 오빠의 모습이 아련하다. 달 밝은 밤. 총총한 별빛아래 휙휙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쌍절곤을 돌려대던 오빠의 눈부시게 푸르던 그 청춘이.

오늘따라 세월이란 것이 참 야속하다. 결코 원하지도 않았건만 오빠를 그리고 나를 어느새 마흔을 넘긴 중년고개로 옮겨다 놓았으니….

덧붙이는 글 | 이 시간에도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일하고 계실 해외 근로자 여러분! 모두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덧붙이는 글 이 시간에도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일하고 계실 해외 근로자 여러분! 모두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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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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