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던 때를 잊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옛날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었던 '감자범벅'

등록 2005.07.01 23:34수정 2005.07.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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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무렵. 어머니는 한 소쿠리나 됨직한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엄마! 뭐하려고 감자 껍질을 그렇게 많이 벗겨? 혹시 감자범벅? 엄마는 그게 아직도 그렇게 맛있어?"

동그래진 내 눈이 우스운 건지 아니면 감자범벅에 질려버린 내 오두방정이 우스운 건지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빙그레 웃으셨다. 곁에 앉아 TV를 보시던 아버지께서 한마디 거드셨다.

"왜 감자범벅이 어때서. 네 엄마 감자범벅 솜씨는 어디 내놔도 안 빠지지."
"아버지. 엄마의 감자범벅 솜씨가 왜 일품인지 아세요?"

"그야 워낙에 기본솜씨가 있으니 그런 거지. 뭐 별다른 이유가 있을라고."
"그게 아닐걸요. 아마도 하도 감자범벅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오랜 숙련의 결과 일걸요."

"많이 만들기는 뭘 그렇게 많이 만들었다고... 어쩌다 한번이지..."
"어쩌다 한번은 쌀밥이 어쩌다 한번이고. 햇감자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울까지 감자범벅이 주식이었을 걸요."


"무슨..."


겸연쩍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시는 아버지는 어쩌면 가장노릇에 무책임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우셨는지도 모르겠다.


감자범벅. 밀가루 음식을 유달리 싫어했던 내게 밀가루와 감자로 만든 감자범벅은 특히나 입에 당기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세끼 중 한 끼는 꼭 감자범벅으로 밥을 대신 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오밤중까지 잔업을 하고 휴일까지도 반납을 하면서 죽어라 일한 어머니께서 받아든 한달 봉급은 손에 받아 들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잘려 나가기 바빴다. 죽기보다 싫었던 어머니의 봉지쌀 심부름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초여름. 동네에서 감자를 캐기 시작하면 어머니의 감자범벅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어 겨울까지 길게 이어졌다.

하루 건너 한 끼. 그리고 일요일 점심. 우리 집 밥상엔 어김없이 감자범벅이 떠억 하니 놓여졌다. 그것도 감자 조각은 가뭄에 콩 나는 듯 어쩌다 한 귀퉁이씩 보였고 온통 밀가루 떡 천지이던 그 감자범벅.

감자범벅을 질리도록 먹었던 그때를 기억하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이미 어머니는 주방으로 가셨다. 껍질 벗긴 감자를 냄비에 넣고 감자가 잠길 만큼의 물을 부은 다음 미리 감자를 삶으셨다.

감자가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 미리 감자를 삶는다.
감자가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 미리 감자를 삶는다.김정혜
감자가 삶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밀가루에 약간의 물을 넣고 숟가락으로 고슬고슬하게 밀가루와 물을 섞어 놓으셨다.

물과 밀가루를 고슬고슬하게 섞은 것을 익은 감자위에 얹고 한참 뜸을 들인다.
물과 밀가루를 고슬고슬하게 섞은 것을 익은 감자위에 얹고 한참 뜸을 들인다.김정혜
한참이 지나자 감자 익은 냄새가 구수하다. 어머니는 익은 감자위에 고슬고슬한 밀가루를 얹고 뜸을 들이셨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오늘 감자범벅도 성공이라는 것을.

감자위에 얹혀진 익은 밀가루는 도대체 빵인지 떡인지 구분이 안 간다. 아무리 봐도 떡에 가깝다. 어머니는 감자와 익은 밀가루 떡을 아래에서 위로 여러 번 뒤집으며 주걱으로 잘 섞으셨다.

감자와 익은 밀가루가 잘 어우러진 감자범벅
감자와 익은 밀가루가 잘 어우러진 감자범벅김정혜
감자의 보송보송한 분이 아주 감칠맛 날 것 같았다. 그냥 감자만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에 들린 주걱은 가차 없이 감자를 으깨고 있었고, 밀가루 떡과 무지막지하게 섞어 버렸다.

옛날, 어머니께서 한 그릇 담아 주신 감자범벅을 난 늘 분이 보송보송한 감자만을 골라 먹다 혼이 나곤 했다. 결국 골라내놓은 밀가루 떡은 언제나 어머니 차지였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그걸로 허기를 채우신 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해마다 햇감자가 지천인 이때쯤 늘 감자범벅을 하셨다. 질리지도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빙그레 웃으셨다. 어머니의 그 웃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추억을 즐기시는 건 아닌 듯싶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또 새삼 들추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픈 추억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그 옛날 그때처럼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건만.

파김치와 콩나물국과 감자범벅
파김치와 콩나물국과 감자범벅김정혜
갖은 양념으로 잘 무친 파김치와 새우젓으로 간을 한 콩나물국, 구수한 냄새가 일품인 감자범벅이 점심상으로 차려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참 맛있게 잡수신다. 그런 두 분을 나는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해마다 이 감자범벅을 보면 나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이걸 먹는 건 아니니까. 사람은 어려웠던 때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야. 어려웠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지금을 감사하고 행복하게 받아 들일수가 있는 거거든. 모든 게 지천으로 넘쳐난다 해도 아직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삼 시 세끼 밥걱정 안하고 사는 것도 큰 복이라고 생각해야해. 엄마는 이 감자범벅을 이젠 별미로 먹는다. 봐라. 옛날엔 배가 고파 먹던 것을 이젠 별미로 먹으니 이만하면 이 엄마도 행복한거 맞지?"

굳이 어머니의 긴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맛있었다. 한 그릇의 감자범벅을 다 먹었다. 밀가루 떡까지도.

포만감과 행복감에 또 지금 내 현실에 대한 만족감에 그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비 내리는 오후 한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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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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