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안테나

등록 2005.07.05 00:31수정 2005.07.0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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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밥을 먹으며 TV를 보던 딸아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 우리 텔레비전 새로 바꾼 거야?"
"아니. 왜?"
"그런데 오늘은 텔레비전이 왜 저렇게 잘 나와?"
"아. 그거. 아저씨들이 고쳐 주신 거야."


그때 남편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힘 있게 펴 보이며 한마디 했다.

"자기 정말 대단한 아줌마야. 그래 내가 인정해준다. 온 동네 케이블 교체 공사까지 하게 했으니, 역시 대단해."
"그게 뭐가 대단해. 나는 내는 돈만큼 당연한 권리를 찾고자 한 것뿐인데."
"하여간 고마워. 자기 덕분에 이제 낚시방송 원없이 보게 생겼어."


열흘 전쯤. 천둥과 번개 때문인지 TV가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겹쳐서 보이기도 하고 화면엔 점들이 반짝반짝 거렸다. 유선방송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서비스 기사가 바로 나왔다. 하지만 하는 말은 똑같았다. 저번처럼.

"여기는 난시청지역이라 이렇게 한 번씩 말썽이 생깁니다. 어떻게 손을 보기는 보겠지만…."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번번이 내뱉는 기사아저씨의 궁색한 변명에 나는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아저씨! 그럼 우리 설치비 내주세요. 우리도 접시 달 거예요. 왜 똑같은 돈 내고 이런 불이익을 당해요."
"아주머니. 아주머니 댁만 그런 게 아니고 이 동네 다 그래요. 여기는 원래 난시청 지역이거든요."
"난시청지역이니까 유선 설치한 거잖아요. 잘 나오면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유선 달아요? 아저씨 저기 저 집들 접시 단 거 안 보이세요? 우리도 저거 달 거니까 설치비를 내주든지 서비스를 해주든지."
"글쎄요. 서비스란 게 여기는 전면 선로교체가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회사에 이야기할게요. 김포시내도 5500원, 여기도 5500원. 한 달 사용료는 똑같은데 우리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난시청이라고 사용료가 싼 것도 아니고. 난시청을 해소하는 게 회사가 할 일 아닌가요?"
"그럼 일단 제가 회사에 가서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한테 화내서 죄송해요.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이런 불편을 겪으니 화가 나서 그래요. 죄송해요."



굳이 기사아저씨에게 화낼 일이 아니었건만 앞뒤 가리지 않고 흥분한 게 미안해서 아저씨께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일단 제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의논을 해보겠습니다."

서너 시간 후. 기사아저씨에게서 반가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대대적인 선로교체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그리고 일주일여. 우리 동네엔 유선방송 차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기사아저씨들이 전봇대에 올라 열심히 공사를 했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집 TV는 딸아이 말처럼 금방 산 새 것처럼 화면이 아주 깨끗해졌다.

김포 시내에서 30여 분 떨어진 우리 동네는 소위 말하는 난시청지역이다. 그래서 TV 시청을 하기 위해선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 동네엔 안테나로 TV를 보는 집이 있다.
아직도 우리 동네엔 안테나로 TV를 보는 집이 있다.김정혜
하나는 아주 옛날에나 볼 수 있었던 잠자리 모양의 안테나를 사용하는 것이고,

요즘 부쩍 많아진 위성접시안테나
요즘 부쩍 많아진 위성접시안테나김정혜
하나는 일명 접시라고 일컫는 적도상공의 정지궤도에 위치한 무궁화 3호 위성을 통해 방송프로그램을 디지털 신호로 전송하여 시청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시스템인 위성접시 안테나를 사용하는 것이고,

유선전기 통신시설을 이용한 케이블
유선전기 통신시설을 이용한 케이블김정혜
나머지 하나는 유선전기 통신시설을 이용하여 수신자에게 송신해주는 케이블 방송인 유선방송을 설치하는 것이다.

지붕 위 안테나가 한두 개뿐인 것으로 봐서 잠자리 모양의 안테나를 사용하고 있는 집은 한두 집뿐인 것 같다. 해서 짐작해 보건대 대다수의 집들이 유선방송을 이용하여 TV시청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접시 달린 집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건 유선방송이 눈이 많이 온다든지 비가 많이 온다든지 하면 노후한 선로 탓으로 화질이 급격히 떨어져 TV 시청에 불편을 겪기 때문에 집집마다 위성접시 안테나를 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일주일에 걸쳐 대대적인 선로교체 작업을 해 고화질 TV시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채널도 무려 70여개로 늘어났다. 남편이 나를 대단한 아줌마라며 치켜세운 이유가 바로 이 늘어난 채널 중에 낚시방송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70여개 채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지울 건 지우고 기억시킬 건 기억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70개의 채널. 하기야 걸어다니면서도 TV를 보는 세상인데 이제 70개의 채널을 본다 하여 혀를 내두를 일은 아닌 것 같다.

내 나이 12살 때 매일 옆집으로 TV 보러 가던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머니께서 빨간색 텔레비전을 월부로 사셨다. 아버지께서 잠자리 모양의 안테나를 지붕 위에다 아주 단단하게 잘 고정시키느라 무진장 애를 쓰신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단단하게 잘 고정해 놓은 안테나가 행여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늘 말썽이었다. 재미나게 보고 있던 김일 프로 레슬링이 갑자기 중단돼 화면이 지지직 경련을 일으켰다. 아버지께서는 비를 맞으며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를 잡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보시며 고함을 지르셨다.

"나오나?"
"아직 안 나옵니더. 이리저리 한 번 더 돌려 보이소."
"어, 어, 아부지 나옵니더. 그 방향입니더. 그 방향에다 고정시키이소."


그러나 김일 선수의 헤딩장면이 잠깐 화면에 비칠라치면 다시 또 화면은 지지직거렸다. 지붕을 향해 소리쳤다.

"아부지! 아까 그 방향이라 안 캄니꺼"

아버진들 화면이 안 나오는 방향으로 안테나를 틀고 싶으셨을까. 비바람에 흔들리는 걸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참이나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고 나는 화면을 흘끔거리며 지붕을 향해 소리 지르고.

지붕에서 내려오신 아버지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고 화면에선 김일 선수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있었다. 철없던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아버지는 뒷전이고 김일 선수가 이번엔 또 어떻게 이겼는지가 늘 궁금했다.

요즘도 나는 우리 동네에 유일하게 남은 한 두 개의 안테나를 볼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집에선 지금도 작고 빨간 TV앞에 온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 주먹 불끈 쥐고 김일 선수가 그 괴력의 헤딩으로 일본선수를 속 시원하게 KO패 시키는 것을 보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쩌면 그 집에선 정말 요지경 같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30년 전. 감히 꿈이나 꾸어 봤을까. 차에서도 TV를 보고, 걸어 다니면서도 TV를 보는 그런 요지경 같은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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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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