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자료사진)정윤섭
강진의 다산초당(다산초당#이고시오)은 초당(草堂)이 아니다. 와당(瓦堂)이다. 그래도 이름만은 여전히 다산초당이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머물던 때는 초당이 분명했을 터이나 지방자치단체인지 후손들인지 그 위대한 어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지나쳐 그렇게 된 것이다.
더 돋보이게 하고 더 극진히 모시고 싶은 그 마음이야 가상하지마는 과공(過恭)도 비례(非禮)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새삼 다산초당에서 확인한다. 위하는 마음이 지나쳐 그 위대함을 깎아내리고 심지어서는 오해까지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유배처를 생각하고 온, 속 모르는 여행객들은 그 떡 벌어진 기와집에 날아갈 듯한 정자(천일각)까지 보고 나면 '귀양살이를 했다더니 별장에서 신선놀음 했구먼' 혀를 끌끌 차고 돌아간다.
못 가본 사이에 물염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화순군에서 돈을 들여 중수하면서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그 정자 앞에 방랑시인 김삿갓의 대리석 조각을 세웠다. 또 까만 오석에 그의 시 몇 편을 새겨 병풍처럼 둘러 세워놓고 그 가운데는 보다 크고 우뚝한 중수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그동안은 나주 나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던 것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군에서 번듯하게 중수를 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늦게라도 문화유산을 알아보고 번듯하게 수리한 처사야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만 그 고마움이 고맙지만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안빈낙도하던 선비들의 정자에 단청이라니...
우선은 물염정의 '물염(勿染)'은 이 정자의 옛 주인이었던 송정순 선생의 호이다. 글자 그대로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하나 속됨 없이 살겠다는 뜻이다. 사화와 당쟁의 시대를 살다간 송정순에게 있어 이곳은 피폐해진 당시 정치현실을 개탄하면서 조용히 속됨이 없이 은거하고자 지은 정자인 것이다.
말년에 대과에 급제한 외손 나무송과 나무춘 형제에게 물려준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정자이기도 하다. 이 곳 동복 땅으로 유배왔던 신재(新齋) 최산두나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과도 인연이 깊은 정자다. 청렴과 절제를 목숨처럼 여기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던 선비들의 정자에 화려한 단청이라니….
내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마는 선비들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정자에 단청을 입힌 것이 법도에 맞는 것 같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다. 절제와 청빈(淸貧)은 모든 선비들의 덕목이었다. 처사는 모든 선비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능허정, 애련정, 청의정, 태극정, 취규정, 승재정, 존덕정, 부용정, 관람정….
물론 창덕궁 후원(흔히 비원이라 부르는)에는 단청을 한 정자들이 많다. 그야 주인이 지존이었던 까닭이다. 그밖에도 단청을 입힌 정자가 더러 있기는 하다. 대개는 관에서 지은 누정이거나 후손들이 중수하면서 그리한 것이다.
그 호사가 오늘날에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고산(孤山) 윤선도의 보길도 세연정조차 단청으로 치장하지는 않았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선비답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단청은 본래 고대사회 지배세력의 건축물이나 국가적 차원의 의식, 종교 의례를 치르는 건물에 한해 일반 건물과 구분하고 엄숙함을 나타내기 위해 시작되었다.
더구나 조선 시대에는 궁궐이나 사찰이나 사당이 아닌 여염집에는 다듬이 돌과 장식 공포와 함께 단청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더욱 이상한 일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하나 속됨이 없이 살겠다던 물염정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정자에 앉아 둘러보는 물염적벽도 멋지지만 근처 마을의 배롱나무를 생긴 그대로 잘라다 쓴 우둘투둘한 가운데 기둥도 자연스럽기가 그지없다. 금아 선생의 수필에 나오는 청자연적을 생각나게 하는 기둥이었다.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이 달려 있는데 하나만 약간 옆으로 꼬부라져 균형 속의 파격이 멋스러운 청자연적 말이다. 전에는 잘 생긴 기둥이었는데 단청을 하면서 짙은 갈색으로 칠하고 부터는 못생긴 기둥이 되어버렸다.
과공도 비례요 지나치면 역사왜곡
지난 3일 갑오농민전쟁 당시 녹두장군 전봉준이 살던 옛집을 찾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을 갔다. 널찍한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우람한 초가집이 보인다. "아, 저 집이구나"하고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 그 옆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더 있었다. 그게 녹두장군의 옛집이었다. 이것도 방 한 칸, 정제 한 칸, 광 한 칸이었던 집을 훨씬 번듯하게 고친 것이라 한다.
담장에 바짝 붙여지은 품새나 좁은 뒤안으로 미뤄 봐도 초라한 작은 집이었는데 그 주변의 옆집 앞집을 사들여 파랗게 잔디를 깔고 정원수를 심어놓았다. 가장자리엔 살풍경한 철책까지 둘러놓았다. 개발에 편자도 유분수지 초가집에 웬 잔디밭이란 말인가?
그러다 보니 널찍한 대지 한 구석에 녹두장군의 옛집이 옹색하게 잔뜩 웅크리고 앉은 이상한 모양이 되어 버렸다. 대단한 인물이니 이렇게라도 해야 잘 모신다고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이거야 말로 과공도 비례요 역사 왜곡에 다름 아니다. 혹시나 이런 널찍한 잔디 정원까지 가지고 있던 집에 산 이가 배고픔을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오해하는 초등학생이라도 생길까봐 겁난다. 들어가는 번듯한 골목도 아마 녹두장군이 여기 살 때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녹두장군의 옛집 바로 옆에 서 있는 훨씬 더 크고 멋있는 초가집은 무엇일까? 녹두장군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텃밭에서 일하던 노인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돌아와 책을 읽다 보니 그 집이 녹두장군 옛집을 관리하기 위한 관리사란다. 머슴이 주인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 사는 듯이 보인다. 애보다 배꼽이 크다더니…. 관리사가 유적보다 더 돋보이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