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장 단사(彖辭)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시각에는 주로 주루나 객점 앞을 어슬렁거리며 동냥을 해야 몇 푼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아예 개봉 최고의 기루인 청화헌 바로 앞에서 자리를 깔았다. 아무리 개방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청화원 문턱에서 동냥질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개방에서도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한다는 독안개(獨眼丐)라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개방의 제자라면 그와 만나길 꺼려했다. 그는 성미가 더러운 작자였다. 그가 원한을 품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지 반드시 해를 입었다. 무공도 모르는 열네 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죽인 무인 둘을 죽이고 개방에 투신한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때 눈 하나를 잃었다고 하는데 그가 십년이 넘도록 두문불출하며 개방의 무공을 익히고 나서 맨 처음에 한 일은 그 사건과 관련된 나머지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사문의 사형이나 윗대 어른들에게 피곤죽이 되도록 맞아도 그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독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문의 존장에 대해서는 원한을 품지 않고 패악을 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십이 넘은 지금 그는 개방의 장로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내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사흘째 청화원 앞에서 동냥질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놈들은 이 개봉에서 꽤나 거들먹거리는 놈들이었다. 가끔 던져주는 동전은 이미 사흘 동안에 한달 정도는 느긋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의 장로인 자신이 직접 이곳에 나와 청화원을 드나드는 작자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아무리 사부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그에게 이곳에 있으라고 한 사람은 사부인 홍칠공 노육이었다. 그라 해도 사부인 노육의 명을 무시할 배짱은 없었다. 방주인 철골개가 시켰다면 불만이라도 내비칠 수 있지만 사부의 명이라면 꼼짝 못하는 것이 독안개였다.
(빌어먹을… 아무리 제자지만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는데… 아직도 코흘리개 꼬맹이로 알고 있으니….)
그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이런 일은 이결(二結) 정도의 제자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헌데 그 때였다. 독안개의 하나 밖에 없는 눈이 반짝였다. 그의 눈에 술이 몹시 취해 걸음이 비틀거리는 장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몸집은 비슷했지만 설명을 들은 인상파기는 아니었다.
(그 자라면 저렇듯 인사불성이 되도록 퍼먹을 리가 없지.)
그는 이내 관심을 접었다. 그의 예상과 같이 그의 앞을 지나가는 그 자의 몸에는 심하게 술냄새가 풍겼다. 영락없이 부모가 물려 준 재산을 어느 계집의 사타구니에 쏟아 붓고 있는 파락호 같았다. 그 자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 벽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독안개는 그 자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빌어먹을 어떤 작자들은 부모 잘 만나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살고, 누구는 이런 데서 비럭질이나 해야 하니 기분 더럽군.)
그러다 문득 독안개는 그 자가 언제 청화원에 들어간 자인지 기억하려 했다. 감시자의 기본은 어떤 자가 어느 때 들어가서 언제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었지만 오늘 저녁은 물론 자신이 이곳에 자리를 깔고 퍼질러 있는 동안 그 자가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는 들어간 적이 없었던 자였다.
(나도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군.)
그는 황급히 깔고 앉아 있던 거적때기를 걷기 시작했다. 개봉 지리에 대해서는 독안개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급히 그 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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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도는 요사이 가끔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왔다. 너무 무료한 탓인 것도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몸이 반응하는 대로 심법을 운기하다 보면 그러한 현상이 더욱 잦아지는 것도 같았다. 몸이 반응하면서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알지 못할 단편적인 일들이 그의 꿈속을 헤집었다. 그것은 깨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스친 나무 한그루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내였지만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툭---!
그는 객방을 나와 거닐다가 자신의 좌측에 조그만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오른쪽으로 돌려지며 이미 그의 손에 쥐여진 꼬챙이 같은 도가 섬광을 뿜고 있었다. 도가 향하는 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피하지 않았다. 광도의 도는 정확히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형님… 천의요."
목소리는 담천의가 분명했다. 하지만 얼굴 모습은 눈 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얇은 청년이어서 매우 건방지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광도는 일순 의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전신을 쭉 훑고 나서는 도를 치웠다. 그의 투박한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잘 왔다."
단지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의 말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미 광도 역시 구양휘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있어 담천의의 상황을 모를 바 아니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광도는 담천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동안 별일 없었소?"
"일단 들어가자. 대형도 여기 계시다."
광도가 담천의를 감싸 안고 들어갈 그 순간 담천의의 귀에 파고드는 전음이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인 것 같았는데 그 전음은 담천의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하게 만들었다.
'단사를 찾으시려면 반 시진 후 좌측에 있는 쪽문을 나와 오른 쪽에 있는 연못을 향해 걸어오세요.'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구양휘를 만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단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단사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 그는 일단 구양휘를 만나보고 물어보고자 한 것이다. 헌데 누군가는 벌써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신검산장에서 마노가 말했듯이 이곳 역시 사소한 일까지 그들의 이목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내에는 두 사람이 술잔을 놓고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광도가 낯선 사내를 끌고 들어오자 구양휘와 혜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광도의 표정을 보아 매우 친한 듯 보였다.
"대형. 누군지 모르겠소?"
생전 처음 보는 자였지만 광도의 말에 두 사람은 누군지 기억하려 애썼다. 그들이 기억해 내기 전에 먼저 담천의가 인사를 했다.
"그 간 안녕하셨소? 천의요."
그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구양휘의 입가의 근육이 풀어지는가 싶더니 전체로 퍼져나갔다. 혜청의 얼굴에서도 의혹스런 빛이 점차 웃음으로 변해갔다.
"그렇군. 아주 그럴 듯해. 잘 왔다."
훌륭한 역용술이었다. 구양휘는 신기한 듯 그가 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변한 건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사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구효기로부터 사정이야 들었지만 그것 역시 피상적인 내용일 뿐이었다. 혜청이 그의 곁에 다가들었다.
"아미타불…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제 모습을 보인단 말이오?"
원망스러운 말투였다. 이 일행에 끼게 된 것이 반드시 담천의 때문만은 아니라 해도 명분은 광무선사가 담천의에게 딸려 보낸 것이었다.
"미안하네."
"일단 앉자."
구양휘의 말에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헌데 모두 어디가고 세 분만 계시는 거요?"
"춘절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갔지. 우리야 뭐 이렇게 떠도는걸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남은거고… 아… 갈제는 신검산장으로 갔어."
부친의 부상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갈인규는 부랴부랴 그곳으로 향했으리라. 부상당한 갈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곳을 빠져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그런데 자네 술 마신거야? 아주 술 냄새가 진동하는군."
"아니오. 얼굴하고 옷에다 좀 뿌렸소. 취한 척 하려니 별 수 있소?"
"진짜 취해볼까?"
"좋소. 밤새도록 한번 마셔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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