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방학 때 제가 가꿀 밭 좀 주세요"

여름방학을 앞둔 고1 딸애의 특별부탁..."대학도 안 가겠다고 하는데"

등록 2005.07.07 19:37수정 2005.07.0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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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디카를 자동으로 설정 해 놓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올 초. 디카를 자동으로 설정 해 놓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전희식
엊그제 저녁때였다. 장맛비에 눅눅해진 방에 군불을 넣느라 연기를 마시고 있던 때였다. 아궁이 앞에 엎드려 불을 지피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입으로 불씨를 살리느라 얼굴이 빨개지게 바람을 불고 있는 이런 순간에 전화가 다 오나 싶었지만 연기 때문에 흘리던 눈물을 슥 문지르고 전화를 받았다. 홍성 풀무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었다. 딸애가 거는 전화는 언젠가부터 참 여유롭다.


“아빠아~.”
“응, 새날이구나. 왜?”
“후후, 뭐 하세요. 지금?”
“안 보이냐? 나는 네가 지금 뭐하는지 다 보이는데?”
“제가 전화 거는 거요? 저도 아빠가 전화 받는 거는 보여요.”
“너 지금 저녁 먹고 생활관에 왔지? 밥 엄청 먹었구나. 저 배 좀 봐라 똥 돼지!”

그런데 내 지레짐작이 빗나갔다. 아직 밥은 안 먹었다고 했다. 이제 막 농사시간이 끝나고 밭에서 나오는 길인데 오늘 캔 자주감자 보랏빛이 너무 예쁘더라는 것이다.

풀무농업고등학교 올 새내기 안내교육. 앞 줄 제일 왼쪽이 새날이다. 겨울 내내 몇 십년 된 엄마의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
풀무농업고등학교 올 새내기 안내교육. 앞 줄 제일 왼쪽이 새날이다. 겨울 내내 몇 십년 된 엄마의 외투를 걸치고 다녔다.전희식
그리고는 ‘아빠, 아빠, 아빠’하고 다급하게 부르더니 ‘지금 우리 집 밭에 무엇 무엇이 어느 정도 자라고 있는지 맞춰 볼 테니 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새날이가 하나하나 새기며 대는 작물 이름을 들으며 나는 풀무학교 실습지에서 저런 곡식과 채소가 자라나보다 하고 눈앞에 떠 올렸다. 내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졌고 특별한 용건도 없이 그냥 전화를 건 딸애가 왈칵 그리웠다.

집을 다녀 간 지도 한 달이 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열일곱 살 나이에 객지에서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기가 벅찰 텐데 한 마디 투정도 없이 전화기 저 너머로 재잘대는 딸 애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왔다.


“아빠. 그런데요. 부탁 하나 있거든요.”
“뭔데? 새날이 부탁 들어주는 재미로 아빠는 살아가지~.”
“저기. 방학 때요. 제가 농사지을 밭 좀 주실 수 있어요?”

이 말에 나는 잠시 딸애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되새겨야 했다. 내가 어떻게 가꾼 밭인데 밭을 달라고? 벌써 아빠 재산에 욕심을 내다니. 미리 상속 해 달라는 말? 아니지 설마 그럴 리야.


새날이 얘기는 방학 때 자기가 맡아 농사지을 밭을 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농사를 잘 짓고 못 짓고를 떠나서 방학계획에 이런 기특한 계획을 포함시킨 새날이가 대견했다.

이어 새날이는 대학을 안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당연히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새날이 학교에 정농회 4대 회장을 역임하신 ‘정상묵’ 선생이 특강을 오셨는데 그 강의를 듣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아빠처럼 그렇게 살면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공부 하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 한 새날이가 자기는 ‘어떤 대학을 가면 좋겠냐’고 묻기에 ‘아빠가 이미 다 정해 놨으니까 새날이는 걱정 마시라’고 했더니 서울대 수학과가 제일 좋다는데 아빠 생각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실상사 작은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수학 선생 덕분에 수의 원리와 신비에 맛을 제대로 들인 새날인지라 수학자가 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한 달 전에 마침 중2인 동생 새들이와 귀가하는 날이 같아 오랜만에 식구들이 같이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찍자고 하니 둘은 장난을 계속 쳤다.
한 달 전에 마침 중2인 동생 새들이와 귀가하는 날이 같아 오랜만에 식구들이 같이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찍자고 하니 둘은 장난을 계속 쳤다.전희식
그보다 서울대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나는 엉겁결에 숨겨놨던 카드를 내 보이고 말았다.

“안 돼. 서울대는 안 돼. 너는 성공회대 가야 돼. 우리나라에 진짜 스승들이 계시고 제대로 된 대학은 성공회대뿐이다.”

물론 이렇게 말 해 놓고 나는 후회했다. 너무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섣부르게 한 말이 혹시 부작용은 없을까 걱정도 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한발 더 나아가 대학을 안 가도 되겠다고 하니 이 녀석이 뭐가 되려고 이러나 싶어 나는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새날이의 생각은 즉흥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천천히 또 얘기 하자고 했다.

방학 때 새날이 몫으로 밭을 떼어 주겠다는 것은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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