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색깔이 저절로 바뀌는 마술춤이네!"

탈북 예술인 공연에 넋이 빠지다

등록 2005.07.08 07:29수정 2005.07.0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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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지난 3월 TV <아침마당>에 소개돼 신비한 마술춤으로 널리 알려진 사계절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계절 옷 색깔이 깜쪽 같이 변하는 이 춤은,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주관한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춤입니다. 이 마술춤을 여러분이 직접 보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박수갈채가 객석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평양민족예술단 주명신 단장이 청산유수 같은 말로 소개가 끝나자 빨간 옷을 입은 7명의 무용수가 무대로 나왔다.


잠시 사진만 찍고 갈 요량으로 뒤늦게 행사장에 들어와 엉거주춤 뒤에 서 있다가, 계속 나오는 춤과 노래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맨 앞자리에 나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던 참이었다.

탈북 예술인들로 구성된 평양예술공연단의 공연을 본 것은 6일 파주시여성단체들이 여성주간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는 파주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였다.

의례적인 행사인지라 잠시 들러 필요한 사진만 찍고 나가려고 들렀던 참인데 들어서자마자 공연장을 울려 퍼지는 매혹적인 테너 <아침이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계속 서 있었다.

인형춤
인형춤한성희

"남한에서는 꼭두각시춤이 있지요? 북한에서도 비슷한 인형춤이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 있어도 정서는 비슷해서 춤도 비슷합니다."

평안도 억양이 섞인 사투리로 노련한 사회를 보는 주 단장의 소개가 끝나자 다소 촌스러운 도령복과 한복을 입은 세 쌍이 나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인형처럼 팔과 다리를 빳빳하게 세우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슬슬 빈자리를 찾아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귀여운 인형들(?)의 익살맞은 춤에 함박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구경하는 관객들은 여성주간 행사인지라 거의가 여성들이었다, 흥이 오른 공연장은 웃음의 열기가 가득 찼고 나이든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중간중간 깔깔대면서 손뼉까지 치며 박자를 맞췄다.

요즘 웬만한 행사 초청 공연에 유명 가수가 와도 한두 곡 끝나면 태반이 자리를 비우는 모습을 자주 봐서 이런 모습들은 좀 의외다 싶기도 했다. 나 역시 각종 행사에 숱하게 취재 다니면서도 이런 공식행사 부대공연으로 펼치는 무용공연이나 음악 연주에 시간을 느긋하게 갖고 끝까지 관람하는 일은 드물다.


의례적인 행사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순서가 정해져 있으므로 행사성격에 따른 부대공연 프로그램 대충 살피고 그 중 사진빨 괜찮겠다는 종목 하나 찍어서 셔터 몇 번 누르고 물러나는 게 보통이다.

사회를 보던 주명신 단장이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회를 보던 주명신 단장이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한성희
아코디언 연주가 이어지고 다소 촌스럽지만 재미있는 '북한식 이도령과 춘향' 공연까지 보고 나자 나는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맨 앞자리에서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마야의 <진달래꽃>을 북한식으로 불러?

"북한 노래를 남한 사람이 부르면 북한사람들은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남한 노래를 북한 사람이 불러도 어딘가 이상합니다. 그러나 남북이 똑같이 감동을 느끼고 감정이 교류하는 노래도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뜻이겠지요. 자 그럼, 북한 가수가 남한 노래를 북한식으로 부르는 것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진달래꽃> 아시죠?"

오빠는 잘 있단다~~~앵콜곡을 흥겹게 부르는  최준희씨.
오빠는 잘 있단다~~~앵콜곡을 흥겹게 부르는 최준희씨.한성희
2년 전 탈북한 가수 최준희씨(27)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전만 해도 설마 마야의 '진달래꽃'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그런 부르조아(?) 냄새가 푹푹 풍기는 최신 신세대 록 계열 곡을 가수라 한들 설마하니 북한사람이 소화할 수 있으랴, 다른 곡이겠지. 만약 마야의 <진달래꽃>이라면 북한식으로 촌스럽게 부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반주가 흘러나오고 노래가 시작되자 3분도 못돼, 마야 특유의 폭발적인 창법은 아니지만 멋있게 터져 나오는 남한식 부르조아 풍 노래를 듣고 그런 기우는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게 증명됐다. 연이어 <뭐야 뭐야>를 부를 때는 청중은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며 함께 소리 높여 부를 정도로 열광했다. 최준희씨는 앵콜송으로 <오빠는 잘 있단다>까지 열광 속에 마무리 짓고 퇴장했다.

"노래를 들으니 남북이 하나로 통한다는 거 아시겠죠? 이제 통일이 되도 걱정이 안 되지요?"
"네!"
"같은 민족이지만 남북이 분단돼 달라진 문화를 극복해서 통일이 되도 문화 차이를 줄여보자는 게 저희가 공연하는 목적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고대하시던 신비한 마술 춤, 사계절 춤을 보시겠습니다!"

신비의 마술춤, 사계절춤

호기심이 부쩍 당겼다. 옷 색깔이 4번 변하는 춤이라니? TV를 거의 보지 않아 이 춤을 본 적도 없지만 북한에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최하는 공연 아니면 볼 수 없는 춤이라는 말이 궁금증을 더했다. 어느새 나는 목을 빼고 무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봄을 나타내는 빨간색 옷을 입고 사계절 춤을 추고 있다.
봄을 나타내는 빨간색 옷을 입고 사계절 춤을 추고 있다.한성희
봄을 상징하는 빨간 옷을 입은 7명이 무대로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라, 4가지로 옷이 변한다더니 겹쳐 입어서 둔해 보이나보다. 언제 옷이 변하나 기다리느라고 무대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뒤로 돌아서서 옷을 바꾸는 중, 순식간에 여름의 초록색 옷으로 바뀌었다.
뒤로 돌아서서 옷을 바꾸는 중, 순식간에 여름의 초록색 옷으로 바뀌었다.한성희
잠시 후에 '여름으로 변한다'는 주 단장의 멘트가 들리고 무대 뒤편으로 두 줄로 모여 뒤돌아 선 무용수들이 가슴 앞단추를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의 녹색 옷으로 바뀌어 있었고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요술처럼 바뀌지?

춤을 추는 도중에도 노란 가을 옷으로 바뀐다.
춤을 추는 도중에도 노란 가을 옷으로 바뀐다.한성희
계속 셔터를 눌러대면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무용수의 옷들은 한 계절이 끝나고 무대 뒤편에 뒤로 돌아 두 줄로 모였다 싶으면 어느새 가을인 노랑 옷으로, 겨울인 하얀 옷으로 바뀌었다.

한 무용수가 뒤에서 하얀 옷을 말아내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지만 어떤 식으로 바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무용수가 뒤에서 하얀 옷을 말아내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지만 어떤 식으로 바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한성희
분명히 옷을 벗거나 뒤집지는 않았는데 제일 앞자리에 있어 자세히 뚫어져라 쳐다봐도 어떻게 바뀌는지 비밀은 알 수 없었지만 재미있고 신기했던 건 사실이다.

긴 치마의 하얀 겨울 옷을 입고 춤추고 있다.
긴 치마의 하얀 겨울 옷을 입고 춤추고 있다.한성희
공연이 다 끝나고 주명신(47) 단장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평양민족예술단은 15명이고 북한에서 예술활동을 하던 사람들로 구성됐고 탈북한지 4년에서 2년, 몇 달 전에 온 사람도 있다고 한다.

주명신 단장
주명신 단장한성희
"사계절 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관하는 공연에서만 선보이던 춤이라는 데 그곳에서 실제로 공연하던 분들인가요?"
"그곳에서 직접 공연하던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어요. 직접 공연하던 사람이 가르쳤어요."
"단장님은 북한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요?"
"교원대 음악교수로 있었습니다. 여기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양성하는 교육대와 같은 대학교입니다. 15년 정도 있었습니다."

4년 전 탈북한 주 단장이 조직한 예술단은 1년에 120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스케줄이 바쁘다. 남북한 문화차이 극복이 이들의 목적이고, 각종 축제나 문화행사 초청받아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북한 어린이 돕기 행사에 무료공연하기도 한다.

그 동안 TV에서 더러 북한 예술공연을 보긴 했지만 눈에 익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문화차이인지 다소 촌스러우면서 이질감을 느꼈는데, 오늘 탈북 예술인들이 펼친 공연에 넋이 나가 1시간이나 주저앉아 있게 한 흡인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명신 단장의 말처럼 남과 북이 오래 단절됐어도 같은 감정과 같은 문화를 공유했던 피가 통하는 한민족이라 교감이 오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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