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같은 저수지에 산과 나무와 구름과 하늘이 담겼다.전희식
집으로 작전상 후퇴를 하여 '풀밀어' 기계를 끌고 와서 반 시간 가량 밀어냈다. <제5공화국>의 전두환처럼 인정사정 없이 무식하게 풀들을 밀어붙였다. 콩밭의 풀들을 제압한 다음에야 나는 홀가분하게 저수지 둑에 올라섰다.
본연의 목적을 잊고 나는 또 딴청이다. 둑을 온통 뒤덮고 있는 무성한 풀을 베어 오는 것이 목표였는데 항상 차에 싣고 다니는 카메라가 일을 그르치게 했다.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찍기 시작했다.
살짝 속살을 드러낸 저수지에는 작은 산 두 개와 큰 산 하나가 퐁당 빠져 있었다. 하늘까지 삼킨 저수지는 말이 없었다. 거울 같았다. 거꾸로 처박힌 산과 나무들은 완전 대칭을 이룬 채 서로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 숨어 담배 한 모금 빠는 순간 삼키지도 못하고 선생에게 들킨 고등학생의 얼굴처럼 정작 저수지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이 없었다.
하얀 밤나무 꽃이 저수지 양 옆에서 얼굴을 저수지에 퐁당 담고서 약간 역한 듯한 밤꽃향을 진하게 풍겼다.
한참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본연의 임무로 돌아서게 한 것은 요란한 라디오 소리였다. 저수지 바로 뒤 야산에서 양봉을 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라디오를 틀었나보다.
그제야 나는 내 키만큼 자란 잡풀들을 거머쥐고 낫질을 시작했다. 산 속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수면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어둠과 함께 찾아 온 피로를 트럭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옷을 갈아입는 순간이 왔다.
하루 네 번이나 옷을 바꿔 입는 멋쟁이 시골농부의 빨랫줄에는 팬티가 하나 모자랐다. 황토와 땀이 훈장처럼 범벅이었던 세 벌의 작업복은 분명한데 팬티만 두 개다. 빨랫줄에 도둑이 들었나? 아니다. 저수지에 풀 베러 갈 때는 팬티 없이 올라갔었나 보다.
내가 저수지에서 풀을 베고 있을 때는 누구든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
덧붙이는 글 | SK 사외보 7월호에 실렸습니다. 사진은 새로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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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바지는 세 벌인데 왜 팬티는 두 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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