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바지는 세 벌인데 왜 팬티는 두 개지?

연예인도 흉내내기 힘든 '멋쟁이' 농부의 옷 입기

등록 2005.07.08 20:02수정 2005.07.0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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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도 이러진 않았다.
아침에 입은 옷은 저녁에 잠자리에서나 갈아입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거의 매일 하루에 여러 번 옷을 바꿔 입는다. 겉옷만 바꿔 입는 게 아니라 속옷까지 다 바꿔 입는다. 신발까지 갈아 신는다면 어쩔 것인가?

씻고 바르고 해 봐야 표도 안 나는, 내일모레면 50을 바라보는 초로의 시골사내가 하루 네 번이나 샤워까지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하니 바람이 났나, 옆집에 잔치가 벌어졌나 할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말라야 다시 입을텐데 날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내일 아침까지 말라야 다시 입을텐데 날씨에 맡길 수 밖에 없다.전희식
아침 일찍부터 고추밭에 나가서 풀을 깔았다. 이틀 동안 트럭으로 두 차 가득 베어 두었던 풀이다. 묵직한 풀 다발을 껴안고 고추 사이사이로 다니며 풀을 까는 동안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은 천천히 온 몸을 적셨다. 풀이 좀 모자랐다.

감자밭을 돌아 방울토마토 밭으로 갔다. 하룻밤새 뻗어나간 줄기를 하나하나 묶어서 에이(A)자 형의 버팀목에 걸어 올리다보니 태양은 사정없이 달아오르고 작업화까지 땀이 흘러내려 질척거렸다.

이것이 첫 번째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 옷을 꺼내 입게 된 사연이다.


점심으로 풋고추 전을 하나 부치고 우리밀 라면에 밥을 말아 먹고는 어제 밤에 엠비시 <제5공화국> 보느라 못 본 케이비에스 <이순신>을 인터넷으로 불러내 볼까 하다가 그보다 더 달콤한 낮잠의 유혹에 빠져버렸다.

오후 두 시쯤. 하늘은 두터운 구름에 가리고 달게 잔 낮잠으로 온 몸에 활기가 살아난 나는 기세도 등등하게 마당으로 나섰다. 우물가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고 물통을 작업장으로 가져왔다. 작은 손수레도 끌고 나왔다.


'농주공법'이다. 황토와 막돌과 통나무로 쌓는 담이다. 원래 담 중간에 작은 창을 하나 달려고 했는데 공기단축을 위해 포기했다.
'농주공법'이다. 황토와 막돌과 통나무로 쌓는 담이다. 원래 담 중간에 작은 창을 하나 달려고 했는데 공기단축을 위해 포기했다.전희식
몇 주째 작업 중인 '통나무 황토담장' 쌓기를 시작했다. 작두로 짚을 썰어 황토와 섞고 물을 흥건하게 먹여 가면서 괭이로 황토를 뒤집는 작업은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괭이와 삽날에 척척 달라붙는 점도가 좋은 황토라야 좋은 흙인지라 함부로 불평도 할 수 없다.

팔뚝 힘. 어깨 힘. 허리힘에다 다리 힘까지 동원해서 하는 일이라 그냥 힘 좋다고 무작정 덤비다가는 한 시간도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힘을 적절히 넣었다 뺐다 해야 한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구름 속에 숨었던 해가 누가 절 반긴다고 빵긋 웃으며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도리없이 괭이랑 삽을 내 던지고 장갑도 벗어 던지고 철수했다. 욕실로.
욕식에서 주물주물 흙만 헹궈 낸 옷을 태양이 작열하는 마당 빨랫줄에 늘었다.
세 번째로 바꿔 입은 옷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였다.
오후 4시 반쯤이었다.

비록 덩치는 작지만 머플러가 터져서 엔진소리만큼은 탱크소리 부럽지 않은 내 11년 된 1톤 트럭에 <제5공화국> 드라마에 나오는 광주 시민군 대장처럼 올라타고 부릉부릉 동네 뒤 저수지로 올라갔다. 저수지로 난 외길에 접어들면서 잠시 망설였다. 인사나 하고 가자고 들렀던 밭인데 그새 딴판이 되어 있었다. 이건 콩밭인지 잔디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울같은 저수지에 산과 나무와 구름과 하늘이 담겼다.
거울같은 저수지에 산과 나무와 구름과 하늘이 담겼다.전희식
집으로 작전상 후퇴를 하여 '풀밀어' 기계를 끌고 와서 반 시간 가량 밀어냈다. <제5공화국>의 전두환처럼 인정사정 없이 무식하게 풀들을 밀어붙였다. 콩밭의 풀들을 제압한 다음에야 나는 홀가분하게 저수지 둑에 올라섰다.

본연의 목적을 잊고 나는 또 딴청이다. 둑을 온통 뒤덮고 있는 무성한 풀을 베어 오는 것이 목표였는데 항상 차에 싣고 다니는 카메라가 일을 그르치게 했다.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찍기 시작했다.

살짝 속살을 드러낸 저수지에는 작은 산 두 개와 큰 산 하나가 퐁당 빠져 있었다. 하늘까지 삼킨 저수지는 말이 없었다. 거울 같았다. 거꾸로 처박힌 산과 나무들은 완전 대칭을 이룬 채 서로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 숨어 담배 한 모금 빠는 순간 삼키지도 못하고 선생에게 들킨 고등학생의 얼굴처럼 정작 저수지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이 없었다.

하얀 밤나무 꽃이 저수지 양 옆에서 얼굴을 저수지에 퐁당 담고서 약간 역한 듯한 밤꽃향을 진하게 풍겼다.

한참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본연의 임무로 돌아서게 한 것은 요란한 라디오 소리였다. 저수지 바로 뒤 야산에서 양봉을 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라디오를 틀었나보다.
그제야 나는 내 키만큼 자란 잡풀들을 거머쥐고 낫질을 시작했다. 산 속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수면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어둠과 함께 찾아 온 피로를 트럭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옷을 갈아입는 순간이 왔다.

하루 네 번이나 옷을 바꿔 입는 멋쟁이 시골농부의 빨랫줄에는 팬티가 하나 모자랐다. 황토와 땀이 훈장처럼 범벅이었던 세 벌의 작업복은 분명한데 팬티만 두 개다. 빨랫줄에 도둑이 들었나? 아니다. 저수지에 풀 베러 갈 때는 팬티 없이 올라갔었나 보다.

내가 저수지에서 풀을 베고 있을 때는 누구든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

덧붙이는 글 | SK 사외보 7월호에 실렸습니다. 사진은 새로 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SK 사외보 7월호에 실렸습니다. 사진은 새로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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