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20회

등록 2005.07.13 07:47수정 2005.07.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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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그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그들 두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현명한 것이었다.

"역시 언노선배의 안목은 놀랍군요. 이 검은색의 구슬은 굉천뢰죠. 또한 이 붉은색 구슬은 벽화탄(霹火彈)이예요. 벽화탄 하나로는 언노선배님의 옷깃 정도는 태울 수 있지만 굉천뢰라면 다르겠죠. 더구나 벽화탄에 의해 굉천뢰가 일시에 터진다면 아무리 화경에 오른 언노선배님이라 해도 무사할 수 있을까요?"


언무탁의 시선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낀 호두알만한 두개의 구슬에 박혀 있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면 자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할 수 없었다.

"네년의 말을 믿으란 말이냐?"

"언노선배님도 천지회의 존장(尊長)이시니 소녀의 사부님이 누구신지는 아시겠지요?"

언무탁도 알고 있었다. 귀진자. 그라면 제자에게 구명지기로 굉천뢰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굉천뢰는 과거 다섯 개가 만들어져 두 개만이 남아 있다고 들었던 터였다. 그 중의 하나가 과연 저 계집에게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기이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생명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시절에는 상대가 강하다면 그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시간은 너무나 귀중했고, 삶에 대한 애착도 욕심처럼 커져갔다.


"냄새나는 계집. 아마 네 할애비가 네년 꼴을 보았다면 지하에서라도 통곡할 것이다."

언무탁은 그녀 손에 들려있는 것이 그녀가 말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를 경동시키면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위하여 그녀가 처녀의 몸으로 담천의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일순 송하령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아무리 합리화한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헌데 기이했다. 그 순간 송하령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아무리 언무탁이 욕을 했다고는 하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으로 족했다. 헌데 그녀는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당황함까지 엿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행이라는 기색을 띠우며 살며시 미소까지 베어 물었다. 짧은 순간에 보여준 그녀의 복잡한 기색은 아무래도 언무탁의 비난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꼬옥 물고는 대답했다.

"소녀가 자신의 낭군을 택하는 것은 소녀 소관이에요. 난세에 태어나 무림에 몸담은 소첩으로서는 떳떳하지는 않지만 부끄럽지는 않아요."

그녀는 소녀라고 자신을 지칭하다가 소첩으로 말을 바꾸었다. 이미 상대가 아는 이상 확실하게 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놀림과 지탄을 받더라도 상관없다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변명일 수 있었다. 헌데 말을 하는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한결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협박이 먹혀들어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변화에 언무탁은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네년은 물러가거라. 처음부터 같은 식구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무탁이 천지회에 몸담고 있다는 송하령의 말은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송하령의 목숨까지 노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담천의를 죽이는 과정에서 송하령이 죽는다면 할 수 없지만 따로 그녀를 죽일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았다.

"너무나 듣기 좋은 말씀이세요. 하지만 소첩이 죽어가고 있는 지아비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더구나…!"

그녀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는 추상같은 위엄이 엿보였다. 여인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앞에서 검을 들고 있던 두 흑의인은 검을 거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제 상황은 변했어요. 지금 언노선배님께서 이대로 물러가 주신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언노선배님께서도 이 자리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했고, 농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믿고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미친 계집아이로구나. 노부가 비록 굉천뢰에 가루가 된다 해도 너희 년 놈을 살려둘 수 없게 만드는군."

언무탁에게도 내심 생각이 있었다. 아무리 모진 여자라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 죽음을 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말을 하면서 기회를 타 그녀가 굉천뢰를 던지기 전에 손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시험 삼아 한발을 내딛었다.

"멈추세요. 한 발만 더 움직인다면 여기 두 사람이 먼저 죽을 거예요."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두 흑의인을 가리켰다. 언무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심 그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굉천뢰를 던질 태세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저 위협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담천의 쪽으로 향해있던 신형을 송하령 쪽으로 돌렸다. 이미 담천의는 서 있기는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금 담천의를 먼저 죽이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내가 죽는다면 저 계집은 정말 손에 든 두 개의 구슬을 던질지도 몰랐다. 가짜라면 몰라도 진짜라면 자신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그녀를 상대하는 것이 나았다.

"네 년 말은 정말 이상하구나. 어떻게 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냐?"

언무탁은 발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송하령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소첩이 '쓰러져라.' 외치면 죽을 거예요."

"네 년 서방이 죽을 것 같으니까 지금 충격을 받아 머리가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니냐?"

"시험해 보고 싶다면 한걸음만 더 오면 알게 될 것이에요."

언무탁은 무심코 한 발을 내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대로 두 흑의인이 그녀가 '쓰러져라'라고 외치는 말에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 걸음을 멈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뇌리 속으로 퍼뜩 기이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저 년의 손에 들린 것이 굉천뢰와 벽화탄이 아닌 보통의 화탄(火彈)이 아닐까? 그래서 노부를 충동질해 걸어오게 해 놓고는 화탄의 사정거리에서 수하 두 명과 함께 날려버리는 속셈이 아닐까?)

너무나 태연자작한 송하령의 모습을 보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그의 추측이 옳다면 방비만 철저히 하면 되었다. 굉천뢰만 아니라면 그는 무사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노부를 충동질하는 것이냐?"

이미 송하령이 귀진자의 제자임을 알고 있던 언무탁은 송하령이 결코 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귀진자는 호풍환우(呼風喚雨) 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기인이 아닌가? 그의 제자이니 영악한 머리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걸음만 다가오면 금방 알게 될 터인데 언노선배님께서는 몹시도 조심스러우시군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빨리 물러가시던가요."

확실히 그녀는 충동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무탁은 그녀의 내심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무엇을 믿고 저리도 자신하고 있을까?)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 말대로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 혼자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일을 처리하고 있을 터였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약속된 것은 이행해야 했다.

그는 뒷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한걸음을 떼기 위해 오른 발을 들었다. 만약 저 계집의 오른 손이 움직인다면 뒤로 튕기듯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의 시선은 송하령의 오른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무조건 뒤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었다. 만약 저것이 가짜라면 그 때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저 년 놈들은 도망갈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을 피해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해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이 도륙할 것이었다.

그는 뗀 오른발을 앞으로 디뎠다. 그녀의 오른 손이 움직이는 듯 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언무탁은 그녀의 오른 손이 움직이려 하자 급히 이장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쓰러져라!"

그녀는 오른 손에 들린 구슬을 던지지 않았다. 다만 던지는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속은 것을 안 언무탁이 벼락같은 고함을 치며 그녀에게 달려들려 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억--!"

멀쩡히 서 있던 두 흑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푹 꼬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언무탁은 달려들다 말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쓰러지라고 외치자 두 수하가 쓰러진 것이다. 분명 그녀는 오른손을 약간 움직였을 뿐이었고, 그 이외의 행동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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