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과체중에 지방간입니다"

직장인 건강검진센터에서 벌어지는 일들

등록 2005.07.18 12:20수정 2005.07.1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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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학교 담벼락 옆에 붙어사는 놈이 지각을 가장 많이 하는 법이다. 이건 불변의 법칙이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병원을 관리 운영하는 곳이다. 그 중 건강검진센터도 있다. 그러나 앞의 말처럼 나는 직장인들이 1년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건강검진을 받아본 일이 없다.


강남에 있는 건강검진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내조차도 한번도 내게 건강검진을 권유한 적이 없을 정도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해'라는 것이겠지만 가끔 서운한 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내게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언젠가 아내의 병원에 우연히 들렀다가 체수분계라는 기계에 올라간 그 날에.

기계의 경고 "당신, 체중 9kg 체지방 초과야"

맨발로 발 모양이 그려진 곳을 딛고 서서 양 손에 권총 같은 손잡이를 잡고 엄지 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45도 밑의 조그마한 모니터에 그래프가 그려진다. 체지방, 체수분, 근육량으로 기억 되는데 내 앞에 그려지는 그래프는 이랬다. 체수분과 근육량은 평균치를 접점으로 멈추어 섰는가 싶더니 체지방은 평균치를 무심하게 지나치고 모니터의 끝을 향하여 줄기차게 거침없이 올라가는 게 아닌가.

'삑'소리와 함께 프린팅 되는 결과지를 보고 나는 숨이 멎었다. 과체중 9kg 체지방 위험수준 초과. 빼야 될 살의 100%는 지방이었다. 그것도 전신에 고루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복부에만 왕창 몰려 있다는 체성분계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기계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그 기계에 올라가지 않았다.


배가 썩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아직 '쫄티' 정도는 무난히 소화시킬만한 몸매임을 은근히 자랑해 왔는데 저 발칙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니.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다만 위안이 되었던 건(?) 그런 당혹감이 비단 나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또래의 대부분의 남자들에 대한 검진센터의 결과치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비겁하지만 묘한 동질감에 나는 안도했다.


바야흐로 건강검진 시즌... 셋 중 한명은 '재검'

a 서울 시내 한 병원의 건강검진센터 입구. 자신만만하게 입장했다가 뜻밖의 결과를 통보받는 경우가 많다.

서울 시내 한 병원의 건강검진센터 입구. 자신만만하게 입장했다가 뜻밖의 결과를 통보받는 경우가 많다. ⓒ 김지영

바야흐로 직장인 건강검진이 한창이다. 검진도 시즌이 있다. 보통 4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각 회사들의 검진이 시작되고 여름휴가 철에 뜸했다가 다시 찬바람 불면 더 큰 찬바람 불기 전까지가 이름하야 성수기다. 여름휴가를 앞둔 아직까지는 출근해서 검진센터 쪽 로비를 가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검진용 가운을 입고 순서대로 검진을 받고 나오는 모습들이 제법 진지하지만 키, 몸무게를 재는 곳과 체수분계 부근에서 초연해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초연할 수 없는 것은 주로 여자 분들의 몫이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서 키 재는 곳에 올라서면 몸무게와 비만도를 한꺼번에 자동으로 계산해준다. 빨간 디지털 숫자로 친절하게 공개되어지는 것이다. 여자들은 이런 대목에선 동작이 번개처럼 빨라진다.

그냥 보아도 단박에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곳에 갔다 나오는 모습들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들에 따르면, 검진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그 긴장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검진결과는 셋 중 하나다. A(정상), B(관리요망), C(재검). 통계상 세 명중 한 명은 C일 확률이 크다. 통계상 C의 대다수는 혈압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통계상 오천 명 중 한 명은 암이다.

경험상 결과치가 C인 사람들과 오천 명중 한명인 사람들 중에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자기가 C이거나 오천 명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던 사람은 별로 없다. 경험상 매년 오천 중 한명 그러니까 이만명 중 네 명안에 20~30대가 있다. 어떤 해에는 전부 20대였던 적도 있었다.

또 굳이 C가 아니더라도 젊은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위염, 지방간, 과체중, 복부비만 등의 진단을 받게 된다.

지방간, 고혈압, 매독까지... 이거 젊은 사람 검진 결과 맞나?

때로는 이런 난처한 장면도 연출된다. 얼마 전일이다. 어떤 탄탄한 기업의 중역인 어떤 사람의 검사결과 매독 양성 반응이 나왔다. 물론 C다. 치료 통보를 해줘야 하는데 이런 때는 정말 처신을 잘해야 한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안녕하세요? 000병원입니다. 저, 결과가 나왔는데요오~"
"예. 그래서요?"
"저어~기 다른 건 다 괜찮은데요오… 매도옥 양성반응이 나와서요."
"그래에~? 벌써 두 번이나 치료했는데…."
"네? 두~번요? 이번에도 꼭 치료 받으세요."(그럼 이번이 세 번째군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평소 헬스클럽에서 몸매를 다져온 듯 가슴이 땡글땡글 하고 얼굴은 구릿빛인 어떤 이십대 남자의 경우를 보자.

외형만 봤을 때는 "몸매 죽이네"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정도다. 보나마나 당연히 결과는 A가 온당할 터. 그런데 C다. 이유는 고혈압. 병은 예기치 않은데서 나타나는 법이다.

어떤 늘씬한 이십대 미혼 여성의 사례도 있다. 체수분계를 올라선 그녀의 얼굴엔 의기양양한 표정이 역력했다. 완벽했다. 지방이나 근육, 수분함량까지 적정선에서 그래프는 한 치도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 병원에선 그녀에게 이런 통보를 해야 했다.
"지금 지방간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올라가 있습니다. 술을 당장에 끊으셔야 합니다. 이곳으로 다시 오시거나 혹시 아시는 병원 있으시면 재검사를 받으시고 반드시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a 한 여성 직장인이 체수분과 체지방, 근육량을 측정하는 '체수부계'에 올라 모니터를 지켜 보고 있다.

한 여성 직장인이 체수분과 체지방, 근육량을 측정하는 '체수부계'에 올라 모니터를 지켜 보고 있다. ⓒ 김지영

'나는 건강하다'고 믿고 싶겠지만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지만 자고로 편견이란 미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래 살고 잘 사는 길이다. 사람들은 흔한 말로 "내 몸은 내가 알아"라는 말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몸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편견일 때가 많다.

물론, 검진이라곤 몇 년째 받아본 적도 없는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당장 나도 검진센터의 각종 기계들에 한바탕 휘둘리고 나면 우울한 결과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치명적인 질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든 오천 분의 일일 경우가 늘 상존한다. 사람은 결국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좀더 겸손하고 보수적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올해도 아내가 내 목을 잡아끌고 검진을 채근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 만큼은 반드시 내 스스로라도 검진을 받아봐야겠다. 피 끓는 청춘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필자에겐 잘하면 삼십 년 이상의 세월이 남아있고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지척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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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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