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등장인물과 기묘한 이야기들

김지원의 새 장편소설 <물빛 목소리>

등록 2005.07.18 20:37수정 2005.07.1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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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물빛 목소리>

책 <물빛 목소리> ⓒ 작가정신

오랜만에 우리나라 신간 소설을 읽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1997년 <사랑의 예감>이라는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지원의 최근작 <물빛 목소리>. 제목부터가 무언가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데다가 김지원이라는 작가 특유의 소설 쓰기 방식이 궁금해서 펼쳐 든 이 따끈한 신간이 주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기묘한 인생’이다.

한 남자와 약혼 여행을 떠난 스물 셋의 여자 영희. 남자와 여자는 열렬히 사랑하지만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벽이 있다. 영희의 애인인 상호는 가슴 속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그녀를 떠남으로써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상호가 보내 준 옷가지 및 돈과 함께 ‘다정한 음식집’에 홀로 남겨진 영희의 삶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버려졌다는 충격으로 말을 잃은 채 환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떠도는 영희. 그녀는 꿈을 잃고 사랑을 잃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 주변에 머무르는 사람들 또한 영희처럼 기묘한 사연을 안고 사는 이들이다. 스물 셋에 여행을 와서는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되어 버린 영희는 주인아주머니와 ‘다정한 민박집’의 터줏대감이 된다.

“영희는 약혼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뻐야 하였다. 날들은 뭉쳐서 지나갔다. 시간의 길속에는 숨겨져 있는 구멍들이 있고 영희는 그 구멍들에 퐁퐁 빠지는지 보면 사흘이 지나 있고 보면 닷새가 지나 있고 했다. 두 주일쯤 지났을 때 영희의 짐이 텔레비전 상자만 한 크기의 상자 두 개에 담겨 배달되었다. 전부 영희의 것만 있었다.”

이렇게 버려진 영희의 삶은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서서히 극복되어 간다. 말을 잃고 드러누워 울기만 했던 영희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주는 장 선생, 아무런 조건 없이 영희를 민박집의 식구로 받아들여 준 주인 아주머니, 그리고 어느 날 찾아와서 민박집의 식구가 된 파키스탄인 지밀의 아들 복돌이.

서로 연관성 없는 이들이 만나 씨실과 날실이 엮여 큰 천을 만들 듯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실제 우리 인생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며 환상과 심리의 세계를 묘사해 간다. 등장인물 모두는 그 천짜기 과정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 민박집뿐만 아니라 영희가 사는 동네 전체가 특이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한국의 고흐’라고 칭해지면서 허름한 농가를 얻어 쓰게 되는 화가 독고 선생, 그가 우연히 만나는 마술사 한얼, 그리고 그 마술사와 연애를 하게 되는 유사비나 등 모든 인물들은 독립된 듯하나 얽혀 있고 또 한편 얽혀 있는 듯하나 각자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들이 벌이는 사건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소설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들은 영희와 연관되지 않은 채 소설의 스토리에 동참한다. 등장인물 각자의 삶이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늘 영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희의 삶과 등장인물 모두의 삶은 다 상처받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영희가 직접 이들과 연관을 맺지 않더라도 인물들은 독립된 개체로써 소설의 스토리 전개에 참여한다.

우연히 만난 독고 선생과 마술사의 대화는 뜬구름을 잡는 듯한 선문답과 같으나 그 속에 저자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매일 밤 제 꿈은 이상스럽기만 합니다.” 라고 낯선 이에게 고백하는 마술사. 그리고 그에 대한 독고 선생의 대답은 더욱 기묘하다.


“내 꿈도 이상스럽기는 마찬가지라오.”

누구나 삶의 기로에서 이상스러운 꿈을 꾸며 혼란을 거듭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의 인생이다. 소설가 김지원은 주인공 영희와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그 인생의 단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들의 인생이 소설적 허구로 물들어 지나치게 환상적인 과정을 거칠지라도 우리 삶을 반영함에는 틀림이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민박집의 방문객 김순남의 딸 보라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들의 삶이 세대를 거듭해 이어짐을 암시한다. 기나긴 방황과 혼란의 물줄기를 헤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영희. 그녀가 보라에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 알려 주면서 보라는 실질적인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마치 영희 자신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자기 삶의 목표를 향해 떠나는 것처럼…

말을 잃고 사랑을 잃은 여자. 그 여자가 겪는 혼란은 길고 그 심연의 나락은 깊었지만 그것을 통해 그녀는 세상의 다른 시각을 얻었다. 소설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런 메시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며 물에 빠진 듯 꿈에 취한 듯 사는 것이라는, 그래서 세상일이 칼로 자른 듯 명확하지 않고 늘 안개 속에 머무른다는 사실.

소설을 덮는 순간까지 꿈을 꾸는 듯한 환상에 빠져 있다가 결국 인생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책장을 덮는다. 김지원이 전하는 <물빛 목소리>에 한껏 취해 있었나 보다. 그 목소리가 과연 어떠한지는 그녀의 문체에 빠져 봐야 진정으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빛 목소리

김지원 지음,
작가정신,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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