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24회

등록 2005.07.19 07:51수정 2005.07.1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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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모르는 체 했다면 굳이 형님의 등 뒤에 칼을 꽂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오."

"네가 굳이 우리의 술자리를 이 춘야루로 택한 것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겠지."


황임은 고개를 끄떡였다.

"형님에게는 불행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겠…군."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앉아 있던 우교의 상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앞으로 숙여졌다. 술상에 그의 머리가 닿을 듯 하더니 다시 느릿하게 그의 상체가 펴지기 시작했다.

우드득---!


그의 등 뒤에서 미세하나마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은 우교의 명문혈이 위치한 곳이었고, 그곳엔 우교에게 착 달라붙어 있던 여인의 흰 손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는 우교의 명문혈 근처에 위치한 등뼈가 아니라 그곳을 누르려 했던 기녀의 손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


기녀의 얼굴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반쯤 벌린 입에서는 한줄기 선혈이 흘러나와 입가를 타고 흘러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가리고 있는 앞섬에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이나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황임의 얼굴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는 곧 바로 느긋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탁탁탁---탁---!

황임이 왼손바닥으로 탁자를 가볍게 내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곁에 있는 동기의 여물지 않은 유두를 희롱하고 있는 오른 손을 대신해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형님이구려. 그 아이는 그래도 꽤 실력 있는 아이인데 그 한 수를 그리 쉽게 무력화시키니 말이오."

"왜 그래야 했느냐?"

우교는 나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있음은 그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왜 사부는 살천문에서 너를 빼내야 했고, 너는 암중으로 방대한 정보망과 힘을 키워야 했느냐?"

우교의 눈빛이 암울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어차피 형님은 이곳에서 죽소."

"죽어야 한다면 죽지. 하지만 그것만큼은 알려주지 않겠느냐?"

"미안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소. 저승에 가거든 부친에게 물어보시오."

우교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균대위가… 초혼령이 무서웠겠지. 아무리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이 알 것을 두려워했겠지. 그래서 그들의 생리를 잘 아는 나를 문주로 내세워 그들의 이목을 흐리게 하고 비밀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았겠지."

황임은 탄식처럼 말을 뱉었다.

"형님은 그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구려."

"나는 사부의 말대로 그들의 이목을 완벽하게 피하기 위해 살천문의 흔적조차 수년간 사라지게 했고, 다행스러운 것은 균대위의 내부 사정에 의해 사부의 예상과는 달리 그 사안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사부의 기우였다."

"아버님이 실수하셨던거요."

"균대위의 힘을… 초혼령의 힘을 알고 있었다면 당연한 조치였다."

우교에게 착 달라붙어 있던 기녀는 애써 우교에게서 떨어지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흡반에 달라붙은 것처럼 여전히 우교의 몸에 붙어 있었고, 보석처럼 빛나던 눈빛도 흐려지고 점차 감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균대위가 온다 해도 두렵지 않소."

아주 단호한 황임의 말이었다. 그것은 이제 자신의 힘이 큰소리쳐도 될 만큼 성장했다는 말이었다. 그만한 세력을 키웠단 말이었다. 하지만 우교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것이다. 황임은 아직 단순한 어린애였다. 왜 사부가 자신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안배했는지조차 모르는 철부지인 것이다.

"겨우 이 춘야루에서 키운 힘으로…? 아니지. 아무 것도 모르는 너라 해도 이 정도 힘 가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

우교의 시선과 황임의 시선이 허공에서 끈끈하게 엉켜들었다. 그것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치열하게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패를 감춘 채 상대의 패를 먼저 읽어내야 했다. 하지만 우교는 잠시 늦출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 위험에 스스로 빠져든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참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말을 끊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나는 오십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오직 두 분을 존경했다. 한 분은 나에게 인성(人性)을 버리라 했고, 또 한 분은 나에게 잃어버린 인성을 찾으라 하셨다."

황임은 우교가 말하고 있는 두 분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 분은 자신의 부친이자 우교의 사부인 황적(黃寂)을 말함이오, 또 한 분은 우교가 모셨던 담명장군이었다.

"한 분은 나에게 완벽한 살인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또 한 분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언뜻 우교의 시선이 담장처럼 둘러진 울창한 수목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어느 분이 옳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두 분 모두 처한 상황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도록 가르친 것이니까… 아직까지 나는 두 분을 향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고, 형님에게 상반되는 내용을 가르쳤던 두 분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구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까…."

"이제 형님도 죽을 시간이오."

삶과 죽음은 언제나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있다. 너무 가까워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면에 숨겨진 죽음을 보지 못한다. 죽음 역시 삶을 보지 못하듯이 말이다. 우리 인간은 희미하게 그어진 그 선을 너무나 먼 것이라 착각하곤 한다.

"누구냐? 사부를 움직이고 너 마저 십수 년 동안 이렇게 준비해야 했던 것은 누구에 의한 것이냐?"

"사람은 각기 추구하는 바가 다르오."

"누구냐? 사부가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고, 내가 모시던 담명 장군이 죽어야 했으며, 너 또한 이럴 수밖에 없게 만든 자가 누구냐?"

"형님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했소."

"누구냐니까?"

목소리는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교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기류가 흘러나와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던 기녀의 몸이 저절로 한쪽으로 기울면서 아름다웠던 얼굴은 핏기를 잃은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제 죽어주시오."

황임은 말과 함께 들었던 술잔을 놓아버렸다. 술잔은 황임의 앞에 놓여있던 접시와 부닥치며 맑고 경쾌한 음을 토했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갑작스럽게 주위에 살을 에일 것 같은 살기가 감돌았다.

파파파---팍---!

술잔에 든 술이 허공에 흩뿌려짐과 동시에 술상 위로 새파란 칼날이 무수하게 솟구쳐 올랐다. 상 위에 올려진 안주접시들이 깨지고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술상 위에만 솟구쳐 오를 뿐 우교나 황임의 자리에는 전혀 미동이 없었고, 두 사람 역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천정에서 한 방울의 피가 술상 위로 떨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 이곳저곳에서 핏물이 물들기 시작했다. 병풍처럼 걷혀진 벽면의 바닥에서도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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