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반'이 생각하고 말해온 것들의 역사

마리트 룰만 외, <여성 철학자>

등록 2005.07.20 19:06수정 2005.07.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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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리트 룰만 외, <여성 철학자> 표지

마리트 룰만 외, <여성 철학자> 표지 ⓒ 푸른숲

독일의 여성 학자들 8명이 함께 쓴 책 <여성 철학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번역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일단 독일어 저작에서 우리말로 옮겨왔다는 점(독일어→한국어)에서 그렇지만, 남성 위주의 철학사에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기입해 넣으려 했다는 점(여성의 이야기→남성의 언어)에서도 그렇다. 또한 수많은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담을 수 있게 단순화하고 축약한 것(아카데미즘→대중화), 역시 넓은 의미의 '번역'에 해당할 것이다.

오해하진 말자. 이 책이 '번역물'이라는 건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부차적인 저작'이라는 뜻이 아니니까. 오히려 발터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라는 글에서 좋은 번역을 "원본을 완성시키는 미메시스"라고 불렀다. 그는 "예술이 자연의 말없는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듯, "번역은 원본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원본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것을 언어화시키는 행위"이며 "원작이 불충분하게 제시한 것을 '보완'하고 '완성'하며 '표현'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번역'이라면, 벤야민적인 의미에서 '번역'이라면,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의 관심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보완'하고, 남성들만이 참여했던 반쪽짜리 철학사를 '완성'하며, 더 나아가 억압받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표현'해내는가.

세상의 반이 생각하고 말해온 것들

책의 서문에서부터 대표저자 마리트 룰만은 "철학사에서 여성이 이룬 성취들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고의적으로 망각되어 왔다"며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아스파시아가 원조였으며, 앤 콘웨이라는 여성이 라이프니쯔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이었다는 사실, 또 아빌라의 테레사가 몽테뉴보다 먼저 수상록을 썼다는 사실 등은 우리가 아는 철학사에서는 한번도 만나볼 수 없는 충격적인 것들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여성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탐색하며 '승리자'인 남성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저술을 말살하거나 남성의 것으로 바꿔버리려고 갖은 노력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또한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들이 어떻게 이들의 본래 모습에 접근하는데 장애가 돼왔었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나 또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인 저작이지만 여성'주의' 철학자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별다른 비판 없이 나열한다. 예컨대 이 책에서 제법 비중을 두고 다뤄지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생물학적인 여성이었지만 계급투쟁 밖의 성차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학자였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고대와 중세에 이르는 철학자들 중 대부분은 아직 '여성'이라는 문제의식의 맹아 정도 밖에(혹은 그조차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잊히고 업적을 도둑맞아야 했다. 따라서 이들을 다루는 것을 정치적인 비겁함이나 무책임함의 소산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 여성들은 당대의 상황에서 단지 사유하고 말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내용에 상관없이 삶을 담보로 한 모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당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여성 철학자의 이야기는 떨어질 수 없다. 이 책이 여성 철학자의 사상 이외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성 철학사'가 아니라 '여성 철학자'인 이유

연대기적으로 여성 철학자들을 배치하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한사코 '여성 철학사'라는 제목을 피했다. 여기에는 기존의 '철학사' 개념에 대한 거부가 배경에 깔려 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오랫동안 '보편'을 해명하는 데 주력했고, 또 '철학사'라는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향해가는 과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보편'이라는 것은 '남성'들의 시각일 뿐이었다.

이미 푸코나 데리다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지식이란 권력일 뿐"이라거나 "로고스, 남근 중심주의"라는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여성 철학자>들의 저자들은 '철학사'라는 제목을 통해 이 책이 또 다른 '보편사'로 받아들여지는 걸 피하려 했을 것이다.

이 책은 '번역'의 과제에 충실하면서도 완성된 '번역물'이 되길 거부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번역'의 끝나지 않는 과정에 참여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확인하는 것은 '확고부동한 여성 철학의 의의'가 아니다. 이 많은 여성철학자들을 한 가지 흐름에 엮을 만한 또 다른 '보편', 이를테면 '여성 철학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여성 철학자'들'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균열들을 발생해내며 계속해서 '고정된' 의미들을 이탈한다. 이 책 곳곳에서 확인되는 것은 '보편'이 결정 불가능하며, 허구라는 사실이다. '철학사'라는 단일한 흐름이나 '차이'를 외면하는 총체성은 재건될 수 없다. 이들에게는 항상 돌아가야 할 진리(남근)가 없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여성'이라는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의 지평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하나 더 제기할 수 있다. 타자화되고 배제되어 밀려났던 이야기들이 '여성 철학자들'에 관한 것뿐일까? "이 책이 서양 여성 철학자들만 다루기 때문에 '미완'의 저작이다"라는 건 차라리 사소한 비판이다.

동양의 철학, 흑인의 철학, 소수 민족의 철학, 게이들의 철학,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지평들은 무수히 많다. 이 지평을 가시화하는 것이 아마 '번역의 과제'일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번역'은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해가며 '표현'해내겠지만 저자들은 제목을 지을 때부터 '번역'이 완수될 수 없음을, 완결된 '철학사'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1.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7월의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2.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설마 설마 하는 독자들을 위해 말해두지만, 이 책의 역자 이한우는 악명높은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와 동일인물(최장집 교수의 사상검증을 주도했던)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자칭 '보수주의자'라는 그답게 보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다행히' 그의 '보수적' 가치관이 개입되는 지점들은 많지 않다. 안심해도 괜찮겠다.

덧붙이는 글 1. 이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7월의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2.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설마 설마 하는 독자들을 위해 말해두지만, 이 책의 역자 이한우는 악명높은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와 동일인물(최장집 교수의 사상검증을 주도했던)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은 자칭 '보수주의자'라는 그답게 보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다행히' 그의 '보수적' 가치관이 개입되는 지점들은 많지 않다. 안심해도 괜찮겠다.

여성 철학자

잉에보르크 글라히아우프 지음, 노선정 옮김,
큰나(시와시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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