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선수 뺏긴 MBC, 테이프 공개할까?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이상호 X파일 윤곽 드러나

등록 2005.07.21 09:33수정 2005.07.2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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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상호 MBC 기자의 'X파일'을 보도한 <조선>의 21일자 기사.

이상호 MBC 기자의 'X파일'을 보도한 <조선>의 21일자 기사.

뚜껑이 열렸다. MBC 보도국이 공개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거듭하던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의 뚜껑이 열렸다. 개봉 주체는 MBC가 아니다. 밀봉 상자를 연 주체는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오늘, 1면 머리기사와 3면 해설을 통해 ‘X파일’과 관련된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나섰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X파일’의 내용은 대선을 코앞에 둔 97년 9월 초쯤 S호텔 한 식당에서 나눈 ‘모 재벌그룹 고위 인사’와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의 대화 내용이다. 모 대선 후보측이 30억 원을 요구했고, 다른 대선 후보에게도 약간의 ‘성의’를 보였다는 게 대화 내용의 핵심이다.

눈길을 끄는 건 <조선일보>의 보도 방식이다. <조선일보>는 녹음 테이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익명으로 처리했다. ‘모 재벌그룹 고위 인사’와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이다. 대선자금을 받았다는 후보도 ‘모’ ‘A, B"로 익명 처리했다.

재벌그룹 고위인사·중앙일간지 고위층 '익명처리' 보도

<조선일보>가 익명 처리를 해야 했던 이유는 다양하게 짚을 수 있다. 사안의 성격상 ‘모 재벌그룹 고위 인사’나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 또 ‘모 대선 후보’로부터 사실 확인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 우선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일보>가 전현직 국정원 관계자들을 광범위하게 취재한 결과 MBC가 입수한 녹음 테이프가 짜깁기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온 상황이다(짜깁기 했다고 해서 녹음 테이프 상의 대화 내용이 조작됐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녹음 테이프가 불법으로 도청된 테이프이기 때문이다. MBC 보도국이 공개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을 어기며 불법으로 도청한 결과물을 그대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불법 도청물이라 해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개할 수 있다는 주장 사이에서 <조선일보>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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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이 논란을 비껴가는 방법으로 ‘일단’ 익명 처리 방식을 택했다. 재계와 언론계 고위 인사가 결탁해 대선 후보에 돈을 건넨, 사회성 짙은 행위는 공개하되, 해당 행위자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사생활 보호 의무도 지킨 것이다.


<조선일보>가 택한 ‘묘수’는 이 뿐만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녹음 테이프에 기록된 대화 내용을 부차적인 뉴스로 내리고, 안기부의 불법도청 사실을 핵심 뉴스로 올렸다. ‘문민’을 자처했던 정권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정계와 재계, 언론계 핵심 인사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불법 도청한 사실을 폭로하고 비판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 접근법을 택함으로써 ‘불법 도청물’에 대한 부담은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불법 도청물’은 안기부의 불법 도청 범죄를 입증하는 강력한 물증이 됐다. 한순간에 애물단지를 보물단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조선일보>는 보도 방향을 ‘불법 도청’으로 잡고 다양한 취재의 결과물을 기사에 녹였다. 전현직 국정원 관계자 여러 명을 취재해 불법 도청팀 이름이 ‘미림’이고, 불법 도청 내용은 안기부장과 국내정보담당 차장 등 한두 명에게만 극비 보고 됐으며, 하루 평균 5-6개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확보할 정도로 불법 도청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선일보>가 보를 허묾으로써 이제 봇물 터지는 일은 시간 문제가 됐다. 여론은 크게 두 방향을 잡을 것이다. 안기부의 불법 도청에 대한 질타가 그 하나요, 재계와 언론계 인사의 대선 개입에 관한 비난이 다른 하나다. 문제는 이 두 여론이 상승작용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배척작용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뚜껑' 열린 X파일... 봇물 터지는 건 시간문제 그러나...

92년 대선 때의 일이다. 당시 정주영 후보측은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초원 복국집’에 모여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대책회의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불법으로 도청을 했다. 대책회의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던 만큼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언론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대책회의의 위법성보다는 도청의 불법성을 집중 부각했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초원 복국집’ 사건의 경험을 떠올리면 <조선일보>의 오늘 보도가 정-재-언 결탁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보를 허문 과단성은 높이 사야 하지만 봇물을 어디로 흐르게 할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초원 복국집’ 사건의 경우 ‘얼떨결에’ 따라가다 ‘이 길이 아닌가봐’라며 돌아섰지만, 이번엔 수개월의 검토와 숙고 끝에 기사를 내놨고, 녹음 테이프에 등장하는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이 경쟁사 관련인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열쇠는 MBC가 쥐고 있다. <조선일보> 보도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MBC가 애초의 ‘공개 불가’ 방침을 고수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정-재-언 결탁의 일단이 공개 된 상황에서 모든 실체적 진실을 공개하라는 여론을 MBC가 법 논리에 기대어 돌파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오늘 밤의 MBC ‘뉴스데스크’를 지켜 본 후 <조선일보>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관심사다. 만에 하나 MBC가 ‘공개 불가’ 방침을 고수할 경우 <조선일보>가 불법 도청과 함께 정-재-언 결탁의 진실도 추가 공개할까?

가늠자는 두 개다. 하나는 <조선일보>가 녹음 테이프를 입수하고 오늘 보도를 내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참고로 <조선일보>는 녹음 테이프 내용을 전하는 기사의 서술어를 ‘알려졌다’로 쓰고 있다.

또 하나는 녹음 테이프 내용 그 자체다. 지금까지 알려진 녹음 테이프 분량은 90분 정도. 따라서 <조선일보>가 보도한 ‘모 재벌그룹 고위 인사’와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의 대화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보도되지 않은 대화 내용이 뭔가에 따라 보도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모 중앙일간지 고위층’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녹음 테이프이기에 당시의 언론계 동향에 대한 언급이 담겼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조선일보> 입장에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담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대야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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