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위험한 커넥션 드러나다

[분석] 97년 <중앙>, 그리고 홍석현 사장과 이회창 후보

등록 2005.07.22 10:45수정 2005.07.2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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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이상호 X파일'로 일컬어지는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의 주인공은 <중앙>과 삼성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다른 주인공'이 빠져 있다. 당시 여당(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중앙>과 삼성이 '특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홍석현-이학수 회동'에 지나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류언론과 재계 1위 재벌기업의 간부들이 여당 대선후보의 대선자금 지원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는 점에서 이 테이프는 '언론권력-경제권력-정치권력'의 위험한 커넥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MBC와 KBS 등의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은 97년 9월 9일 서울 S호텔 일식당에서 만나 이회창 후보에게 30억원을 지원하는 방안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회창 전 총재쪽은 "재벌그룹에 정치자금을 요구한 일은 없었다"며 "이번 사건의 본질은 대선자금보다는 불법도청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97년 <중앙>의 노골적인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이 테이프가 만들어진 97년에는 이회창 후보(신한국당)와 김대중 후보(새정치국민회의), 이인제 후보(국민신당)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중앙은 노골적인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이는 대선문건 파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전직 기자는 "오히려 조선이 중립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중앙은 대놓고 이 후보를 지지했다"며 "당시 중앙은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의 기관지였다"고 회고했다.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은 97년 11월 29일 "중앙의 편집국장과 정치부장 등이 이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대선전략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며 '이회창 경선전략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이란 문건을 폭로했다.


문건은 포용력 부족과 '법대로' 이미지 탈색 등 이 후보 경선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포용력 제고와 미래지향적 인상 부각 등을 개선방향으로 제시했다. 또한 창자론·씨말리기 등 사석에서 과격한 언어사용 등을 스타일상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 등 야당이 거세게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국민회의는 "중앙이 이 후보의 1급 참모임이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심지어 국민신당은 "앞으로 남은 선거기간 중에는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아닌 중앙을 주적으로 삼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97년 2월 고흥길 전 편집국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이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홍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고 전 국장이 임기도 끝나지 않은 채 논설위원으로 발령난 뒤 얼마 안 지나 이 후보 진영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이 후보와 홍 회장이 사전에 협의한 것 아니냐는 눈총을 받았다.

경기고-서울대(KS)의 학연으로 맺어진 이회창과 홍석현

당시 홍 회장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의 배후로 지목됐다. 언론계에서는 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회창 정부의 첫 국무총리에 홍 회장을 임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심지어 홍 회장이 차기 대통령까지 노리고 있다는 성급한 관측까지 제기되었다.

이 후보와 홍 회장의 연결고리는 '학연'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한국 권력지도를 점령하고 있는 경기고-서울대(이른바 'KS출신')출신이다. 이는 중앙이 이 후보를 지지한 배경에는 정치적 성향 이외에 학연이라는 '연줄망정치'가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언론들은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의 대결을 'K1(경기고)과 K2(경복고)의 대결'로 분석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고출신 언론인 모임인 '화동클럽'이 97년 대선 당시 은밀하게 이 후보 지지활동을 펼쳤다는 점도 언론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화동클럽의 회원 중에 중앙출신이 타 언론사보다 월등히 많았다는 점도 이런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을 것이다.

또한 홍 회장의 부친과 장인 역시 이 후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홍 회장의 부친인 홍진기 전 중앙 회장(작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은 사실상 이 후보의 고교·대학교 선배다.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 제1고보와 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법학과를 나왔는 점에서 그렇다. 장인인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법률고문으로 시작해 박정희 정권 내내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등의 요직을 거친 법조인출신이다.

홍 회장은 97년 이회창 후보의 패배 이후 한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보광그룹 세무조사에 이은 구속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와 관련, 홍 회장이 삼성과 결탁해 대선자금 지원을 논의하는 등 노골적인 이 후보 지지활동을 벌인 사실을 김대중 정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앙>은 홍 회장이 구속된 뒤에야 비로소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사실을 시인했다. 99년 10월 프리츠 국제언론인협회(IPI)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1997년 12월 대선 당시 홍(석현)씨가 회장 겸 발행인으로 있는 <중앙>은 김대중씨에게 패배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며 "김(대중) 대통령은 홍씨의 이같은 죄악을 쉽게 잊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개혁정권'을 표방한 노 대통령은 작년 11월 안팎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 회장을 주미대사로 전격 발탁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시련을 겪었던 그가 노무현 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를 중용한 것과 관련, 노 대통령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불법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보고받았는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만약 그런 내용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미대사로 발탁했다면 노 대통령은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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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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