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에 나타난 이방인 하멜

<하멜 표류기>을 다시 읽고

등록 2005.07.26 17:30수정 2005.07.2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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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역사 교육을 통해 들은 하멜 표류기는 우리에게 참 친숙한 여행기이다.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내는데 큰 역할을 한 히딩크 감독과 동향이라는 이유로 한때 새로운 모습으로 여기저기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귀에는 익숙하지만 실제 하멜 표류기가 어떤 내용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지 않을까?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으며, 배가 난파하여 조선에 잠시 머물다 탈출한 화란인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하멜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a 다시 읽는 하멜 표류기

다시 읽는 하멜 표류기 ⓒ 웅진닷컴

부족한 역사교육과정에서 누락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 책을 구입했다. 사실 책 전체를 읽고 나서의 느낌이나, 다른 관련 역사학자들의 평에 따를 때 하멜 표류기는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멜 자신이 실제로 조선을 탐사하고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체류한 기간이 아니라 이교도의 땅에 억류되어 호시탐탐 탈출을 꿈꾸는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열의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뒷 부분에 있는 하멜 표류기 및 조선 왕국기의 완역본을 먼저 읽어본다 하더라도, 체불된 임금 협정을 위해 작성된 보고서 정도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으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현장이 저술한 ‘대당서역기’ 등의 전문 기행문과 비교해 볼 때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하멜 표류기의 텍스트에만 근거하지 않고, 조선실록 및 비변사등록 등 조선시대 다른 문헌과 서양인의 하멜 표류기에 대한 연구결과, 그리고 일본의 서적까지 대조해가며 하멜 표류기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어서 하멜의 저작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흥미로운 정보들을 제공한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 17세기 조선은 단순히 문을 걸어닫고 있는 쇄국의 시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롭게 부상한 청나라 사이에서 명을 도와 청을 치려는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야심찬 효종의 시대였다. 북벌을 계획하며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 조련하고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이 조선을 떠나 정보를 유출시키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외국인의 내방이나 퇴출을 가급적 억제하였으며, 비슷한 이유로 하멜과 그 선원들도 억류되었다.


비록 억류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선원이 청나라 사신에게 직접 면회를 청하기 위해 무단 이탈한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는 훈련도감에 배속하여 호패를 발급하고 급여를 주어 그 생활을 돌봐주고, 이국땅에 살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동정심 가득한 효종과 조정 관리들의 모습이 실록 및 비변사의 기록을 통해 보여진다.

또한 하멜 이전에 화란 선원으로 국내에 난파하여, 병자호란 때에 전쟁에 나가 부역하고, 이후 하멜과 선원들이 표류하였을 때 등장하여 통역 등의 역할을 하는 박연의 모습도 흥미롭다. 하멜을 만나 분명 본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멜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벨테프레, 즉 박연에 대한 언급은 현재 존사를 모르겠다는 투로 마감된다. 이미 아내와 자식을 얻어 코레시안이라 불리던 박연에게 아마 조선은 화란 이상의 조국이었을 것이다. 그 후손에 대한 기록 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라 하겠다.


하멜과 선원들은 체류하는 동안, 처음에는 훈련도감에 나중에는 전라 좌수영으로 옮겨져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 같다. 그들이 배웠던 조선어 기록에 근거해 볼 때 일반 서민들과의 접촉이 활발하였던 것 같으며,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새롭게 가정을 얻어 뿌리를 내렸던 선원들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에 나타난 큰 코와 흰 피부, 파란 눈의 외국인은, 일반 민중들에게는 지금 우리들이 외계인을 만나는 듯한 기분을 안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원들이 별다르게 특별한 기술은 가지고 있지 못했는 듯,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활용된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멜의 일지에 따르면, 마을에 부임하는 관리의 성향에 따라 그들의 생활이 편하거나, 구속되거나 하는 등의 차이를 보일 뿐, 나머지 시간은 별다른 행동의 기록이 없다.

하멜의 조선왕국기에는 일지가 아닌 당시 조선국에 대한 여러 정보가 들어 있는데, 쓰시마가 원래 코레아 땅이었다는 문구도 눈에 띈다. 특히 형벌 및 종교에 대한 하멜의 기술이 재미있다. 또한 조선의 승들은 예전에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하늘에 닿기 위해 탑을 쌓다가 하늘의 분노로 인해 여러 개의 언어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멜이 적어 놓았는데, 이러한 바벨탑 전승과 유사한 내용이 당시 조선의 승려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하멜이 윤색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고대 한민족의 역사서에는 이러한 내용의 기술이 있었던 것인지 의구심만 자아낸다. 또한 조선 왕국기에는 하멜이 보고 간 조선이 고급 관리들의 사회가 아닌 생생히 살아있는 민중의 조선사회였다는 내용을 느끼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아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저자는 하멜이 표류했던 시절, 유럽의 열강 등이 이익을 위해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헤매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상황과 일본의 반 기독교적인 사회체계, 그리고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를 기점으로 하는 대유럽 무역 등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17세기에만 해도 조선은 도달하기 힘든 하나의 섬국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동물도 보석을 치장하고 다닐 만큼 부가 가득한 나라로 알려졌다고 한다.

코레아 원정함대 중에는 공식명칭이 ‘보물섬 원정대’였었던 적도 있다고 하니, 당시 하멜 표류기가 유럽 사회에 일으킨 반향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대마도를 통해 조선과의 교류가 여의치 않자, 직접 조선 반도에 기착하여 무역을 성사시키기 위해 코레아를 찾기 위한 노력, 또한 공식적인 루트로 무역의 성립이 어렵자, 정복해서라도 이득을 차지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당시 유럽인의 모습은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대륙의 자원을 오직 유럽인의 부를 위해서만 착취하였던 약탈자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어 준다.

이 책은 하멜의 글을 단순히 번역함에 그치지 않고, 말 그대로 하멜 표류기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다시 정리하면 하멜 표류기 내용 자체는 그다지 큰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이교도의 땅에 유배된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여진 조선의 모습을 기초로 하여 당시 조선에 대한 생생한 장면들을 눈앞에 그려주고 있기 때문에, 비단 하멜 표류기의 내용을 습득하는 것 이상의 유익함을 제공한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서점 Yes24및, 리더스가이드에 등록된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 서점 Yes24및, 리더스가이드에 등록된 글입니다.

하멜표류기 -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13년 20일의 기록

헨드릭 하멜 지음, 김태진 옮김,
서해문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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