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귀는 안녕하십니까?

길가의 소리를 통해 들여다 본 세상

등록 2005.07.27 08:45수정 2005.07.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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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인가 아닌가, 판단은 주관적이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비틀스 음악이 그 앞 세대에게는 깡통 두드리는 소음으로 들렸다고 한다. 반대로 기계의 굉음이 근대화가 시작됨을 알리는 벅찬 팡파르로 들리던 시절도 있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행된 새로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시위하면서 내는 소리가 80db(데시벨) 이상이면 단속 대상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소음일지언정 당사자들에게는 거리까지 나와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요구요, 정당한 주장일 것이다.


노점상의 목 메이는 호객 소리도 마찬가지다. 교통 소음이나 아파트 위층에서 내는 소음처럼 고의성 없는 소음에는 어떤 한도를 제시할 수 있겠으나, 사람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는 그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규제하기 힘들다. 누군가의 조용하게 살 권리를 보호하려다가, 다른 이들의 생존권이나 시위권 또는 의사표현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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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위 김윤섭


지금 들리는 소리, 소음인가 아닌가

소음을 달리 생각해 보자. 소음인지 아닌지, 듣는 사람의 주관만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사람의 주관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내는 소리가 소음이 아니고 뭔가. 소리는 누군가 들으라고 내는 것이고, 그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면 필요는 충족된다. 그 선을 넘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들리는 나머지 소리가 소음이다. 그게 10이건 1이건 불필요하므로 소음이다. 예컨대 "춘향아, 사랑해!" 달콤한 사랑 고백도 춘향이 아닌 내게 들리면 소음이다.

"서울 시민 여러분!" 하는 속 시원한 명연설이 경기도민한테까지 들렸다면, 시와 도의 경계선을 넘은 소리이니 소음이다. 자꾸 그러면 경기도민들 기분 나쁘다. 우리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왜 여기까지 들리게 시끄럽게 굴어? 대한민국에 서울 시민만 있는 줄 아나?

불필요한 소음은 삼갈 수 있는데 삼가지 않아서 뻔뻔스럽고, 억지로 들어야 하는 피해자는 괘씸해서 더욱 괴롭다. 우리 주변에는 괘씸한 소음이 들끓는다. 우리더러 하는 말 아니고 들으라는 것도 아닌데, 귀 달린 죄로 들을 수밖에 없는 소음. 이런 소음만 도려내도 훨씬 조용해질 것이다.


a 소음 측정

소음 측정 ⓒ 인권위 김윤섭

지난 5월 23일 오전 9시경,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에 있는 A초등학교에서 아침 조회가 시작되려 한다. 남자 교사가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줄을 세우려고 "전체, 차렷!" "앞으로 나란히!"를 반복하고 있다. 그 운동장에서 50m쯤 떨어진 아파트에서 측정한 소음 크기 73db.

소리란 상대적이라서 차가 많이 다니는 찻길 옆에서 대화하려면 70db 이상으로 고함을 질러야 한다. 그러나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서 73db의 소음은 단지 전체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다. 학교가 보이지 않는 뒷줄 아파트 주민도 하려고만 든다면 일어서서, 학생들과 동작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학교와 길 건너 마주하고 있는 아파트 복도에서 측정해 보니 82db, 잠자던 아기들이 깰 지경이다. 학교 교문 앞, 84db. 교사의 구령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아 뒷산에 메아리친다.

그 학교는 4월 초부터 5월 초까지 어린이날 행사를 대비해, 학생은 물론 아파트 단지 주민도 질릴 만큼 무용 연습을 시켰다. 민요, 가요, 팝송과 함께 "하나, 둘" 박자 맞추는 지도교사의 구령, "무릎을 펴라고 했잖아!" 따위의 꾸지람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으니까.

흔히 학교 근처에 살면 시끄러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빗소리나 개구리 우는 소리처럼 자연스러워서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심각한 소음은 마이크를 잡은 어른의 목소리였다. 아이들은 결코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 어른만이 마이크를 쥐고서는 한결같이 아이들에게 주목하고 집중하라고 외친다. 주민의 신경도 덩달아 쏠린다. 강압적인 말투,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토해 내는 발성, 소리만 들어 보면 학교는 이삼십 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a 확성기

확성기 ⓒ 인권위 김윤섭


통화 내용, 듣거나 말거나

'소음·진동 규제법'은 학교, 병원, 공공도서관 부근에서 낮에 옥외 확성기로 낼 수 있는 소음을 80db로 제한한다. 그리고 '환경정책기본법'은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낮에 소음이 50db 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A초등학교는 교육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그 기준을 스스로 깨버렸다. 그리고 주거 전용지역인 이웃 아파트 단지의 소음 한도 학교 지역과 같다.

교사도 많은 이웃 주민을 괴롭힐 의도가 있었을 리야 없다. 백년대계 교육을 위한 일인데 거리낄 게 뭐냐는, 오래된 타성에 젖은 게 아닐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지당한 훈계도 학교 담장을 넘으면 소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게 아닐까. 타성도 따져 보면 이유가 있다. 떵떵거림은 단순히 소리를 내는 행위가 아니라 우월함의 표현이다. 좋겠다. 학교 이웃 주민 중에는, 담 너머로 학생들과 더불어 배울 의사가 없는 이들도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5월 20일, 밤 11시쯤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이촌 구간. 한 20대 여성이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지하철에 타서는, 문에 붙어 서서 내내 이야기하다, 역시 통화하면서 내렸다. 그동안 소음 수치 72db. 같은 날 오후 3호선 교대-압구정 구간의 소음과 비슷하다. 4호선의 경우 밤이 늦어 잠이 든 승객이 많이 있었는데도 소음 수치가 비슷한 이유가 그 여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따지기 복잡하므로 접어 두자.

문제는 통화의 내용이다. 그 여성은 그날 하루 일과를 여자 친구에게 보고(?)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품평, 자신의 속셈, 자기가 그들한테 한 거짓까지 거침없이 토로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 앞에서라면 입에 올리지 않을 법한 단어와 표현도 마구 튀어나왔다. 집안 갈등, 시댁의 치부, 연애 관계, 직장의 비리, 거래 조건, 질병의 세밀한 묘사, 모모라는 인간의 더러운 인간성. 휴대전화기를 입과 귀에 대고만 있으면 사람들은 만인 앞에서 못할 말이 없다.

a 핸드폰

핸드폰 ⓒ 인권위 김윤섭


집에서도 그럴까? 아닐 것 같다. 젊은이들은 집안 식구들 못 듣게 제 방에 들어가 문 꼭 닫고 통화하고, 어머니가 엿듣기라도 하면 사생활이니 뭐니 하면서 펄펄 뛴다. 남자들은 집에서 전화를 받을 때 목소리부터 다르고, 여자들은 식구들 나가고 없는 낮에 주로 통화한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왜 남 앞에서는 좔좔 나올까?

이상한 비유지만, 식민지 시대 제국의 백인 여성은 식민지 남성 앞에서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식민지 남성을 남자로도, 인간으로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 앞에서는 인간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니까.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에 대고 제 비밀을 떠드는 이들은, 주위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들어도 비밀이 새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들어봤자 반응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한테 영향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휴대전화 통화자들은 옆 사람들도 자기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 순간 옆 사람들은 외국인도 청각장애자도 아니건만, 사람 말소리를 듣고도 못 알아들어야만 한다. 들어도 못 알아듣는 존재, 동물이나 사물.

누구를 위하여 텔레비전은 떠드나

그러나 익명의 대중도 인간이다. 들으라는 말 아닌데 언어는 뚫린 귓구멍으로 들어와 사고와 감정을 잠식한다. 휴대전화 통화자들은 옆 사람들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남에게 억지로 보게 하는 노출증 환자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경찰에 끌려가건만, 알고 싶지 않은 개인적 비밀을 억지로 듣게 하는 이들은 왜 잡혀가지 않을까? 육체보다 인간 내면의 노출이 수천 배 더 노골적인데. 욕설만 폭력이 아니다. 사람의 말소리 중에 상관없는 이들한테까지 들리는 모든 소음이 다 폭력이다.

5월 22일 일요일, 저녁 8시 전철 1호선 안양역 대합실. 아홉 줄의 의자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았고, 앞에 텔레비전이 켜 있다. 앞에서 다섯 번째 줄에 앉아 측정한 소음 크기, 69db. 왕왕거리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때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텔레비전은 떠드나.

크고 편평하고 납작한 최신형 텔레비전은 혹시 지루할지도 모르는 역 이용객을 위한 서비스다. 그것을 설치한 철도청이 예상하는 시청자의 범위는 그걸 보고 들으며 즐거울 사람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한테까지 강요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의자가 거기밖에 없으니, 안 즐거운 사람은 서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퀴즈 프로그램이 나왔는데, 항간에 떠도는 으스스한 소문, '5초의 법칙'은 사실이었다. 5초마다 박수, 웃음, 감탄 중의 하나가 반드시 터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음량은 73db, 역 밑 선로로 전철이 지나갈 때 오르는 수치만큼이나 껑충 뛰었다.

책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의사에 반해 텔레비전이 강력하게 주의를 끌어당겼다. 보고 싶은 사람만 보라고 텔레비전을 갖다 놓았지만, 결과적으로 텔레비전 시청을 부추겼다. 왜 하필 텔레비전인가? 국민에게 권할 만한 자투리 시간 활용법으로 텔레비전 시청이 가장 바람직한가?

a TV

TV ⓒ 인권위 김윤섭


공공장소의 시청각 서비스는 의도와 달리 공해가 될 위험이 크다. 소리의 크기와 종류, 빛의 밝기, 색채, 특히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는 공간 배려 등 설치하기 전에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공장소는 선택권 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밖에 없는 곳이라서, 시청각 서비스가 싫은 사람은 고통을 모면할 방도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휴대용 라디오, CD플레이어, 조만간 나온다는 휴대용 텔레비전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있고, 그런 것 없이도 다른 장소에서 얼마든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요즘은 길거리까지 시청각 서비스가 밀려나온 지경이라, 서비스 없는 데가 차라리 희귀하다. 공공장소만큼은 썰렁해도 된다. 썰렁함이야말로 비영리적인 장소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서비스다.

5월 25일, 세 차례에 걸쳐 경기도 안양-과천, 과천-서울 강남역, 강남역-사당역을 달리는 버스를 갈아타면서 차 안의 소음을 재보았다. 모든 버스가 다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아 소음량 79db 정도, 매우 시끄럽다. 라디오 소리는 정류장에 설 때마다 잠시 그치는데, 근처 상점 광고 방송이 나오기 때문이다.

83db, 다수가 모여 시위할 때의 규제 한도를 넘는 소리다. 라디오 방송은 서비스도 아니다. 운전기사가 채널을 선택했는데, 자기가 듣고 싶어서 틀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승객이 좋아하리라고 짐작해서 틀었다 해도, 그게 어떤 방송이건 승객 모두 좋아하리라고 어떻게 짐작하는가.

광고는 말할 것도 없다. 운수 회사에서 운영한다 해도 버스 또한 대중교통, 서민의 발, 사회 인프라이며, 정부 보조금까지 받는 공중을 위한 시설이다. 버스 이용자는 소비자이기 전에 공중이다. 버스에 탄 공중의 처지를 보라. 그들은 목적지까지 차 안이라는 닫힌 공간에 갇혀 있다. 유리창은 광고지로 도배되어 창 밖도 잘 보이지 않는데, 머리 위로 운전기사가 권유하는 라디오 방송이 쏟아진다. 그 라디오 방송마저 몇 분 간격으로 끼어드는 광고 방송 때문에 나왔다 만다 한다.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버스는 승객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승객들은? 멍하다.

80db 소음, 임산부의 양수막 파열시킬 수 있어

환경부 홈페이지 '눈높이 환경 교실'에 따르면, 80db은 기차 지나가는 소리 정도고, 임산부의 양수막이 조기 파열되는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70db은 전화벨 소리, 교통량 많은 찻길에서 나는 소리인데, 말초혈관을 수축시키고 부신 피질 호르몬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수준부터 청력이 손상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듣고 살아야만 하는 소리만으로도 위험수치가 넘는다. 불필요한 소리,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소음을 신경 써서 줄여야 한다. 나로 인하여 생기는 사소한 소리를 두려워해야 한다.

남이 내는 소음에 대해서는, 법적 규제 이전에 효과적인 대처법이 있다. 나 들으라는 소리나 불가피하게 들어야만 할 소리 아니라면, 듣기 싫다고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옆집 피아노 연습 소리는 항의하면서, 나를 포함하여 다수를 괴롭히는 뻔뻔스런 소음에 대해서는 우리는 수동적이다. 눈살을 찌푸릴지언정,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는데 굳이 나서서 제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일이다. 소리는 여러 사람이 같이 듣는다고 양이 나눠지지 않는다. 익명의 다수 속에 끼어서 들어도 나의 고통은 고유하다. 그걸 나 말고 누가 해결해 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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