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피해자로 태어나 인권운동가로 떠나다

한 젊음이에 대한 추모사

등록 2005.07.27 08:46수정 2005.07.2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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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이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월 29일 아침, 3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김형율 님은 한국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이다.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원폭2세 환우의 인권을 위해 일하며 기력을 소진했다. 그는 인권운동가인 동시에 피해 당사자였다. 2002년 3월 국내에서 최초로 자신이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어머니를 둔 원폭2세로서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 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활동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도 이미 극도로 지친 몸을 이끌고 과거청산 관련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 원폭 후유증인 폐렴 증세로 이미 폐 기능의 80%를 잃은 상태에서, 그의 도일(渡日)은 가히 죽음을 무릅쓴 결단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떠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에 이 젊은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을까?

그간 TV와 언론매체를 통하여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많은 한국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들 희생자는 대부분 경상남도 합천과 경기도 평택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으로 일자리를 구하거나 전시의 강제부역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물렀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귀향했으나 고국으로부터 아무런 의료적, 경제적, 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질병과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살아왔다.

이와 같은 원폭 피해자의 문제는 일제 강점기라는 과거가 한국 사회에 남긴 상흔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이슈나 사회 정의, 또는 역사 해석의 문제만은 아니다. 원폭 피해자의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해 가장 본원적인 조건을 이루는 ‘몸’과 관련된다. 김형율 님은 한국 원폭2세 환우회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우리들의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 20세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수탈 정책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연장되어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2003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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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 인권위 김윤섭


그의 말처럼, 원폭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통해 고스란히 재생된다. ‘광기의 역사’는 역사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2세, 3세의 ‘몸’에 생생하게 현존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원폭2세 환우의 존재야말로 원폭 피해자의 문제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접근방식에 대해 반대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아직 1세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된 마당에 왜 성급히 2세를 운운하는가! 더욱이 2세 중에는 건강한 사람이 더 많은데 자칫 이들을 사회적인 편견에 시달리게 할 소지가 있지 않은가!

이제 이러한 의구심은 김형율 님의 안타까운 죽음과 더불어 불식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목숨을 건 헌신을 통하여 원폭 피해자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주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원폭2세 환우의 문제는 광복 60주년을 맞은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남긴다.

이른바 ‘과거사 청산’이란 소란스러운 정치적 이벤트나 거창한 기념행사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한마디로 ‘인권’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우의 ‘몸’ 앞에서는 어떠한 화려한 정치적 ‘언사’도 다 거짓이다.


김형율 님은 자신의 실존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는 지병을 개인적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원폭 피해자 인권 문제로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 역사적 상흔임을 몸소 체득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을 부단히 역설해 왔다. 평소 김형율 님의 눈물겨운 활동을 안쓰럽게 지켜봐 온 지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생전에 염원했던 바를 뒤늦게나마 헤아려 보려 한다.

우선 그는 원폭2세 환우들이 서로 아픔을 나누고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2년 그가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 알린 후 원폭2세 환우회를 결성할 때 회원은 고작 2명에 불과했지만 그 후 몇 년 만에 67명으로 불어났다. 그의 운동은 초창기에는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원폭 피해자 내부의 차가운 시선이라고 늘 말했다. 이번 일본 방문 때도 그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측의 한 원로가 행한 모멸적인 언사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둘째로, 김형율 님은 국가 차원의 광범위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2003년 8월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한 걸 계기로 국가인권위의 건강 실태조사가 2004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루어진 것은 큰 성과였다. 이를 통해 그간 심증으로만 추정되던 원폭 피해자의 실태가 단편적이나마 입증될 수 있었다. 이제는 좀더 충분한 예산과 일정이 확보된 본격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나서야 할 보건복지부는 팔짱만 끼고 있다. 이처럼 일이 지연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김형율 님은 ‘선지원 후규명’의 해법을 제시했다. 원폭 피해자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기에 면밀한 조사와 법적 공방의 결과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순수한 인권적 차원에서 정부 차원의 의료원호 사업이 실시되어야 한다. 그는 일본처럼 국립 원폭 전문 병원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원폭 피해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 발의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의 시행령에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이 빠져 있다.

김형율 님은 6월에 열리는 임시국회에 원폭 피해자 관련 특별법을 발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는 이 법안에 ‘원폭2세 환우’라는 표현을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결코 자기중심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청원서를 보면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간접 원폭 피해자들의 존재가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결국 사사로운 이권이 아니라 우리와 후손의 인권이 문제인 것이다.

끝으로, 김형율 님은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하는 합천에 ‘한국원폭피해자 인권과 평화를 위한 박물관’을 설립함으로써 그의 운동이 일단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는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인륜적 범죄와 그것이 낳은 참상이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축으로 국내외 반전평화운동 세력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자료의 정리나 순수한 학술적 연구가 아니었다. 그는 개개의 생명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에 공감하며 이를 애도하고자 했다.

김형율 님은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그러나 그의 삶은 원폭 2세, 3세 환우들이 더 낳은 삶을 쌓아올릴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었다. 김형율 님이 진정으로 염원했듯이, 그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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