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인권위에서 찍은 사진.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인권위
인권위 내부의 문화적 균형자, 마오리 자문관
마오리어로 부르는 환영 노래가 끝난 후 그들이 우리에게 답가를 청했다. 우리는 잠시 주저하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고~”로 시작하는 ‘진주조개잡이’를 노래하자 작은 놀람의 탄성과 함께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간간이 보였다. ‘진주 조개잡이’의 유래가 마오리족 연인의 안타까운 사랑을 노래한 것이어서 우리가 마오리 노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그들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일일이 손을 잡고 “키아 오라”라는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는 의미의 마오리어를 하면서 코끝을 살짝 접촉하는 마오리식 인사를 하였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외국인과 코를 접촉한다는 것이 낯설기는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따스한 인사였다. 나이 지긋한 한 여성은 “몸이 차갑네요” 하면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우리는 정말 마음으로 ‘환대’ 받았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담아내면서도 멀리서 온 이방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동적인 환영 행사였다. 오래 전 그 땅의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그 땅의 소수자로 밀려난, 마오리인과 그렇게 만났다.
2004년 12월 연수 과정에 뉴질랜드 인권위원회를 방문했는데 그때 받았던 환대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1978년에 설립된 뉴질랜드 인권위는 성, 장애, 인종 차별 피해자에 대한 구제업무, 인권교육,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 등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관으로 우리 국가인권위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마오리족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일도 업무 중 하나다.
뉴질랜드 인권위 사무실을 방문한 둘째 날, 자신을 마오리 자문관 Maori Advisor 이라고 소개하는 로버트 씨를 만났다. 마오리 자문관인 자신이 하는 일은, 뉴질랜드 인권위가 ‘문화적으로 안전’하도록 만드는 것, 마오리족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 그들의 이슈가 뉴질랜드 인권위에서 다뤄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로버트 씨는 마오리인이 차별당하는 일이 일어나면 조정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뉴질랜드 인권위 직원들에게 마오리어와 마오리 노래를 가르치는 등 마오리 문화를 교육한다. 위원장 바로 아래 직급으로 상위직 매니저인 그는 같은 일을 하는 한 명의 직원과 함께 일한다. 본부 오클랜드사무소와 수도 웰링턴 인권위 사무소에도 마오리 자문관이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영어로만 말하기’, 마오리인 차별 사례
그의 설명에 따르면 뉴질랜드에는 마오리 TV 채널이 따로 있으며 마오리에 대한 A·A (Afirmative Action). 적극적 차별개선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뉴질랜드 인구 중 마오리인은 15%인데 교육수준이 가장 낮으며 교도소 수용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건강 수준도 제일 낮아서 출생률도 높지만 사망률도 높고 평균수명도 65세로 다른 뉴질랜드인보다 훨씬 짧다. 이들의 취업률도 낮아서 실업수당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마오리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오리 국회의원도 있고 판사, 변호사, 의사, 과학자 등 주류사회에 편입한 마오리인도 소수 있다. 마오리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따로 있어 마오리어로 수업하고 있지만 세대간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으며 마오리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유한 사람이 점점 감소하는 추세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마오리족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형편이다.
현재 뉴질랜드에서는 영어와 함께 마오리어도 공식 언어다. 1998년 마오리어 사용과 관련한 차별사건이 뉴질랜드 인권위에 접수되어 인권재판소를 거처 법원에서 승소한 사례가 있다.
마오리족 두 사람이 상점에서 마오리어로 이야기하는데 상점 주인이 그곳에서는 영어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며 마오리어 사용을 제지한 사건이다. 조사받을 당시 상점 주인은 마오리족 사람들이 자신에게 욕을 하는 줄 알았고 마오리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만약 물건을 많이 사고 돈을 많이 쓰는 중국인이 들어와서 중국어로 이야기해도 제지했겠느냐는 것이 대다수 마오리인의 인식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 상점 주인이 피해자들에게 1만 2000달러를 보상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뉴질랜드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세계에서 원주민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나라 중 하나다. 원주민인 마오리족에 대해 다양한 적극적 조치가 존재하는데, 특히 마오리족의 진출이 미비한 부분에서 행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리족 교사가 부족할 경우 교사를 지망하는 마오리족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정도다.
그러나 최근 뉴질랜드에서는 몇 세대 동안 속으로만 곪아왔던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다. 방송이건 어디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에서는 와이탕기 조약(Treaty of Waitangi)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영국과 맺은 ‘와이탕기 조약’의 두 가지 해석
와이탕기 조약은 1840년 뉴질랜드 땅에 처음 들어온 영국 총독이 500여 명의 마오리족 추장을 만나 땅을 나눠 갖자고 하면서 맺은 조약이다. 그러나 당시 통역자는 대부분 신부나 목사였는데 영어와 마오리어의 뉘앙스를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오리어 버전과 영어 버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훨씬 나중에야 발견되었다.
영어 버전에는 영국이 통치권(sovereignty)을 갖는다고 되어 있으나, 마오리어 버전에는 영국이 총독직(governorship)을 갖는다는 식이다. 마오리인은 영국인과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백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만다.
조약 체결 이후 본격적으로 이주한 영국인이 무단으로 마을을 세우고 경작지를 만들면서 마오리족과 충돌이 이어졌다. 급기야 영국은 1860년 마오리족과 전쟁을 벌여 조약 체결 시에는 10만 명이 넘던 마오리족 인구가 4만여 명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백인은 땅에 대해서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마오리족과 끊임없는 갈등이 빚어지는 발단이 되었다. 뉴질랜드 인권위 내에도 와이탕기 조약과 관련하여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면서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과정은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그 땅의 주인으로 평화롭게 살다가 영국에서 건너온 이방인에게 땅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제는 주변인에 머물고 그 땅의 소수자가 된 마오리인. 다른 나라 인권기구와는 달리 원주민 중에서 자문관을 선정하여 마오리족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뉴질랜드 인권위.
마오리 사람들이 마오리족으로서 자신감이 부족하고 영국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전하는 로버트 씨의 커다랗고 슬픈 눈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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