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다섯 노철학자가 들려주는 ‘열정적인 삶’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등록 2005.07.27 22:44수정 2005.08.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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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이라는 야구 선수가 있었다. 사자같은 갈기머리, 넘치는 카리스마. 한때 국내 프로야구의 최정상까지 섰던 그는 실력으로 견주겠다며 몇 해 전 혈혈단신 일본으로 떠났다. 순탄치는 않았다. 아니 악전고투였다. 승부는 미국으로까지 옮겨 계속됐지만 영광보다는 수난과 치욕이 더 많았다.

두달 전쯤인가. 천안의 한 콘서트장에서 록커로 변신한 이상훈을 보았다. 밴드와 함께 해드뱅잉도 선보이며 열창하는 이상훈은 영락없는 록커였다.


나는 왜 이상훈이 한국과 일본, 미국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이어지는 역경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감독과의 불화가 발단이 됐다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통할만한 야구를 때려치우고 록커로 변신한 근본적인 까닭도 잘 모른다.

다만 그의 공연을 본 뒤 한 가지 추측은 떠올랐다.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열정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열정을 회피하거나 숨기지 않는 그의 원칙이 무대와 직업은 달라졌어도 이상훈이라는 일관된 캐릭터를 형성한 것은 아닌가라는 짐작.

이상훈에게서 박이문을 보다!

미다스북스에서 지난 1월 출판된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이하 <열정>)을 읽는 동안 엉뚱하게도 이른 다섯의 박이문과 서른여섯의 이상훈이 자꾸 겹쳐 보였다. 연배로도 반세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 그들이 자꾸 닮은 꼴로 읽혀진 것은 왜일까?

우선 한 나라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박이문은 서울대 문리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57년 동 대학원에서 불문학 석사를 받았다. 졸업뒤에는 서른살도 되지 않아 이화여대 조교수에 부임하는 등 일찌감치 대학에 안정된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몇 년 뒤 그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불쑥 프랑스로 떠났다.

꼭 30년 전이었다.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1년간 공부했던 파리를 향해 한국을 떠났다. 명색은 '유학'한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인즉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의 결단은 퍽 무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미 만 31세의 나이였다. 이미 이화여대에서 4년간의 교편을 잡고 조교수의 자리에 있었다. 이 점에서 당시 나는 '행운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여건이 좋아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도 막막했다. 게다가 건강마저 무척 나빴다. 공부하겠다고 떠나기로 했지만 정확히 무슨 공부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학위를 따보겠다는 구체적 계획이나 목적을 세우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언제 돌아와서 자리를 굳히고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나는 말하자면 덮어놓고 떠났다. 기약도 없이 막막한 객지 모험의 길로 나섰다.(144-145p)


책 속 구절에도 나타나듯 그의 출국은 지금으로 치면 '묻지마' 유학인 셈이다. 성공했느냐고? 글쎄다. 어쨌든 몇 해 동안 프랑스에서 공부한 박이문은 1963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논문을 받는다. S대 출신에 프랑스박사학위의 간판. 이쯤하면 한국에 돌아와도 괜찮은 교수직 하나 건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박이문은 또 한번 순례를 결정한다.

손에 쥔 것은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별로 없었다. 지난해 작고한 세계적 철학가 돌뢰즈, 1963년부터 64년까지 소르본느 대학 '철학연습세미나'에서 박이문을 지도했던 돌뢰즈가 써준 추천서 한 장이 버팀목이었다.

미국에서 분석철학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박이문은 1970년 서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미국에 온 지 약 2년 반 만에 미국 대학에서 학생 생활을 마무리하고 철학교수로 변신한다. 미국에서 한 강의는 1991년 국내 대학으로 돌아오기까지 계속됐다.

박이문에서 이상훈을 보다!

<열정>에는 박이문의 세가지 목소리가 얽혀 있다. 철학자 박이문, 시인 박이문, 근본적으로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 박이문. 박사학위도 철학과 문학 두 가지를 받고 한국어, 불어, 영어를 공통적으로 구사하며 집필하는 박이문에게 철학과 문학의 아우름 그리고 그 둘로 상징되는 지적인 삶은 오래 전부터 꿈이었다.

내가 택한 길은 지적 삶이다. 시인 작가로서 인간의 영혼을 흔들 수 있는 예술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조하는 강렬한 삶을 살고 싶었고, 사상가, 철학자로서 여태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궁극적 진리를 밝힘으로써 투명한 지적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넓은 의미에서 사상가인 동시에 시인, 철학자인 동시에 문필가를 줄곧 꿈꾸어 왔다. 이렇게 살면서 내가 정말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존재와 현상에 대해 궁극적 의미의 발견 즉 일종의 종교적 진리의 발견과 체험이 아니었던가 한다. 22세의 키에르케고르가 자신의 일기에 적어 놓았듯이, 나는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를 찾아 그런 가치에 따라 디오게네스나 마르크스, 안티고네나 사르트르처럼 투명하고도 강렬한 삶을 철저하게 살고 싶었다.(156p)

<열정>을 텍스트삼아 박이문의 이력을 쫓다보면 최소한 그가 철저히 살기 위해 부단히 힘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거 같다. 특히 모방의 철학이 아닌 독창적인 철학세계로 '둥지의 철학'을 정립해가고 있는 노학자의 모습은,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관성에 찌든 학인들에게 분명 죽비소리다. 또 <열정>에서는 철학을 대하는 프랑스와 미국의 학풍 차이를 엿볼 수 있고 돌뢰즈에 대한 '뒷담화'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지면에 발표됐던 원고들을 모아놓은 탓에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부분도 있다. 서문에서 박이문은 "설사 그것이 반면교사"이더라도 "나의 초상화가 혹시 다른 이들, 젊은이들의 삶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총정리해 자서전적 책자인 <열정>을 냈다고 밝혔다.

노철학자의 열정적인 삶의 기록은 그의 바람대로 젊은이들에게 좋은 사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여러 장마다 반복해 등장하는 유년기의 추억, 골방독서의 향수, 지적 삶에 대한 자부심은 그것이 기성 발표원고를 책으로 묶은 편집에서 빚어진 것이라 해도 식상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박이문은 본명일까, 가명일까. 정답은 가명. 그러나 연구서적과 시집 등 5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펴낸 그의 이름으로 '이문'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나는 시인, 사상가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필명을 허虛라는 글자가 아쉬운 채로 1952년부터 이문異文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절 나의 꿈과 밀접히 관계된다. 평범하지 않고 이색적인 즉 독창적 문필가가 되겠다는 자신에 던진 선언이었다. 주옥같은 문필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채워보자는 것이었다.(216p)

덧붙이는 글 |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덧붙이는 글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미다스북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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