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 소니가 오락기를 만들어?"

파괴적 혁신 다룬 <성장과 혁신> 편집자 후기

등록 2005.07.28 10:22수정 2005.07.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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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혁신>(Innovator's Solution)은 참 재미있는 책이다. 우선 요즘 언론의 단골메뉴인 '혁신'이 왜 힘든지를 아주 상식적으로 설명해 준다. 조-중-동을 비롯한 종이신문들이 오마이뉴스나 무가지 때문에 쩔쩔 매는 이유를 <성장과 혁신>에서 논하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이론으로 설명해 보자.

혁신?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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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혁신은 그토록 어려울까? 경영학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크리스텐슨은 <성장과 혁신>을 통해 그 이유를 명쾌하게 밝혀 준다. ⓒ 세종서적

종이에 쓰던 내용을 인터넷에 옮기는 건데, 돈 받고 팔던 걸 광고 더 많이 싣고 공짜로 주면 되지 뭐가 어렵냐고? 종이 신문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되어 온 프로세스에 따라 제작된다. 컴퓨터 화면의 유저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종이 지면과 촉감, 레이아웃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고, 온라인이 아니라 출력된 글을 읽어야 제대로 감이 잡히는 사람이 글을 쓰고 편집을 한다. 데이터센터와 서버가 아니라 거대한 종이더미와 윤전기가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일일이 트럭과 오토바이에 실어서 배달을 해야 한다.

이런 프로세스는 수십 년 동안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되어 왔다. 종이신문의 베테랑들은 철저히 이런 환경에서 커왔다. 더구나 수백, 수천 명이 기술적으로, 심리적으로, 금전적으로 얽혀서 작업을 한다. 그들의 노하우와 몸에 익은 습관, 그리고 그것의 종합체인 조직-시장 메커니즘은 한 개인은 물론이고 인간 집단도 인지하거나 컨트롤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견고하고 정교하다. 무수한 기업들이 '구관이 명관' '하던 거나 잘 하자'는 태도를 보이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다.

딜레마- 하던 거나 잘할까, 새 판을 벌일까

흔히 혁신을 외치는 논자들은 기득권을 버려라, 고정관념을 타파하라고 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성장과 혁신>의 저자인 크리스텐슨은 이렇게 말한다.

"너나 잘 해보세요, 그게 어디 쉽게 되는지……."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현재의 핵심 역량, 그리고 돈 되는 시장과 고객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되고 최적화된 조직 구조와 프로세스를 (재)활용하는 것이 기업으로서는 가장 쉽고 '남는 장사'라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다.

즉, 조선일보로서는 종이신문을 더 개량하고 혁신하는 것이 '되는 길'이다. 크리스텐슨은 이런 유형의 혁신을 기존의 핵심역량(기자, 디자이너, 영업인력 등)과 핵심시장(종이신문 구독자)과 핵심네트워크(광고주들 등)를 파괴하지 않고 존속시킨다는 의미에서 '존속적 혁신(Sustainable Innova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크리스텐슨은 (내용적 성향과 무관하게) 조선일보의 각종 핵심을 무력화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오마이뉴스를 '파괴적 혁신자'라고 부를 것이다.

좋았던 옛것은 나쁜 새것을 당하지 못한다

물론 종이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의 심리적 저항은 클 것이다. 디자인도 후지고, 잘 읽히지도 않는 온라인 신문이 눈에 거슬린다. 독자들은 짜증스럽게도 돈도 안 내는 주제에 무슨 리플은 그리도 많이 달아서 사사건건 '이것도 기사냐'는 식으로 면박을 준다. 결국 코웃음 치며 냉소하거나, 저항하거나, 변화하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텐슨은 이런 변화에 대한 저항이 기존의 성공기업들에서 매우 보편적이며, 따라 변화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에 진공관 오디오를 만들던 미국의 오디오 명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소니가 트랜지스터 워크맨을 들고 나왔을 때 코웃음을 쳤다.

"지금 장난하니, 장난해?"

아이러니하게도 워크맨이라는 파괴적 혁신으로 전자제품의 명가가 된 소니 내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은 소니를 먹여 살리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를 만들겠다고 구다라기 켄이라는 '풋내기'가 설쳐대자 소니의 명장(明匠)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우리 소니가 오락기를 만들어?"

잉크젯과 PS의 성공-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크리스텐슨의 논지는 이렇게 정리된다. 성공하면 안주하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다(이건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오마이뉴스에도 해당이 된다!). 하지만 그는 기업 경영도 해보고, 컨설팅도 하는 매우 노련한 현실주의자다. 그래서 이런 딜레마에 대처하는 방법론도 제시한다. 개념상으로는 매우 쉽고 상식적인 '파괴적 혁신'의 방법론이 이 책의 두 번째 미덕이다. 간단히 말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로 정리된다. 사람, 조직, 자금, 심지어 건물과 공간까지도 철저히 독립 시켜서 새로운 혁신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너무 쉽다고?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과거에 초거대기업인 IBM은 복사기 시장에 진출해서 제록스와 한판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결과는? IBM의 대패였다. 혁신의 아버지로 한국 CEO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는 잭 웰치의 GE. 이 기업도 컴퓨터 분야에선 규모 면에서 게임이 안 되는 IBM과 맞붙었다가 망신을 당해야 했다. 최고의 인재, 정예조직,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건만 결과는 '참혹' 그 자체였다. 공격(파괴적 혁신)과 수성(존속적 혁신)은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싸움인 것이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그건 오가 노리오라는 CEO가 구다라기 켄에게 완전히 독립된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별도의 공간, 별도의 예산, 별도의 팀, 별도의 의사 결정 구조를 부여했기에 플레이스테이션은 소니를 먹여 살리는 밥줄로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오가 노리오는 비즈니스의 아버지 격인 모리타 아키오로부터 '혁신'에 대한 본능을 물려 받았다).

HP의 잉크젯도 비슷한 케이스다. 잉크젯이 막 나오던 시절, HP의 주력은 레이저프린터였다. 알다시피 레이저프린터와 잉크젯 프린터는 기술적으로 전혀 다르다. 게다가 레이저프린터를 만들던 HP의 '장인'들로서는 잉크젯 기술이 한마디로 '유치짬뽕' 그 이상일 수 없었다.

만약 HP의 기존 조직과 프로세스 속에서 이 기술을 개발하려 했다면, 심각한 저항에 부닥치고 푸대접을 받다가 결국 유야무야(구관이 명관, 하던 거나 잘하자)되었을 것이다. 결국 잉크젯 사업부는 외따로 떨어진 건물에서 본사의 아무런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화학공장, 플라스틱 공장, 디자인업체, 종이업체 등을 쫓아다니고 밑바닥부터 박박 기어서 '대박신화'를 일궈냈다.

번역서 편집자의 딜레마

<성장과 혁신>의 문제의식은 비즈니스는 물론이고 사회의 다양한 조직에 적용될 수 있는 훌륭한 이론이다(민주노동당은 과연 파괴적 혁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상식적이고 풍부한 현실 연구를 기초로 했기에 믿음이 간다. 다만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인문이나 사회, 정치 분야와 달리 경제-경영 분야는 약간만 깊이 있는 내용을 다뤄도 번역자들이 힘겨워할 때가 많다(적어도 내 경험 한도 내에서는!). 아직까지 한국에는 경제-경영서적을 능수능란하게 번역할 만한 번역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성장과 혁신>은 외국에서 나온 경제-경영서적을 편집하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울 수 있는지 절절히 느끼게 해준 책이다.

미국의 경제-경영서적은 핵심 내용을 제시한 스승과 집필 실무를 담당하는 제자의 공동 명의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의 핵심 아이디어라 할 '파괴적 혁신 이론'을 내놓은 사람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이다. 실질적인 집필은 딜로이트 컨설팅 그룹의 마이클 레이너가 담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레이너는 뭐랄까, 약간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문학적인 비유나 수사, 다양한 역사 지식, 철학, 과학 등 경제-경영 분야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내용을 매우 풍부하게 써먹는다. 게다가 문장은 또 왜 그렇게 시적인 비약이 많은지……. 김소월의 시를 영어로 옮긴다고 생각해 보라. 이 책의 원서에는 비즈니스적인 내용을 소월의 시 같은 문장으로 표현한 대목이 걸핏하면 등장한다.

덕분에 번역 실무를 맡은 전문 번역자는 매우 괴로웠다. 딜로이트 컨설팅은 감수를 해야 했지만 나중엔 결국 포스코에서 컨설팅 업무에 종사하는 담당자가 주경야독 식으로 번역을 대폭 손질해야만 했다. 그 기간이 무려 3개월. 편집자가 손을 보고, 외주 교열자가 문장을 다시 손보고. 문장을 만드는 데만 무려 4명의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저자인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은 1970년대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했고, 지금도 보스턴의 한인커뮤니티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에도 매우 능통하다고 한다. 그가 이 번역본을 읽고 난 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덜덜덜, 떨린다.

덧붙이는 글 | 양승요 기자는 세종서적에서 <성장과 혁신>을 편집한 편집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양승요 기자는 세종서적에서 <성장과 혁신>을 편집한 편집자입니다

성장과 혁신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외 지음,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 옮김,
세종서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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