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폐교의 복도. 남들은 영화 '여고 괴담'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고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에 딱 좋은 곳이다.오창경
"또 무서운 꿈을 꾼 거야? 엊그제 그 귀신이 또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가려고 했던 거야?"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게 귀신일까? 사람일까?"
"아무래도 이 폐교 터가 공동묘지였나봐. 내가 다녔던 여학교도 공동묘지에 세운 거라 비 오는 날 야간 자습할 때면 기분도 안 좋고 유령 같은 거 봤다는 애들도 있었거든."
우리는 그 날 밤을 형광등도 끄지 못하고 서로 손을 깍지를 껴서 꽉 잡고는 공포 속에서 침대에 기대어 앉아 날을 새고 말았다.
간밤에 그런 소동을 두 번이나 겪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우리 폐교를 떠나고 싶을 정도로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간이 유달리 커서 무섬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오기였다. 우리가 시골 행을 감행하면서 파란만장하게 겪었던 집 없는 설움을 다시 귀신한테까지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시댁에서 사준 아파트에서 살림을 시작한 우리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신혼 부부였는데 당시 하던 사업보다는 뭔가 생산적인 사업을 항상 구상하고 있던 남편 덕에 결혼 2년만에 시골 행을 감행하게 되었다. 시골살이에 대한 준비기간엔 지금 살고 있는 폐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지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친지가 우리에게 팔기로 했던 집과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면서 우리는 졸지에 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다행히 그동안 사귀어 놓은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회관이 비어 있으니 임시로 살면서 집을 짓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둘째를 낳아서 한 달간 친정에서 몸조리를 끝내고 돌아온 곳이 시골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마을 회관이었다. 박스에 넣은 이사 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방 한 칸에 쌓아 놓고, 동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필요한 것만 꺼내서 산 것이 6개월이었다.
그 사이 우리가 사놓은 땅에 집을 지으려던 계획은 면에서 도저히 시골에 살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지 전용을 해주지 않아서 다시 한번 물거품이 된 상태였다.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미아가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마침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사를 나가는 이 폐교를 우리가 임대하게 된 것이었다.
비로소 시골 행 1년여만에 우여곡절 끝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과 살림살이를 제대로 늘어놓고 재미있게 살려는 참인데 그깟 귀신 때문에 다시 짐을 꾸려야 하다니...
나는 차라리 '고스트 바스터'가 되는 편이 다시 이사를 하는 편보다는 훨씬 쉬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집 없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 더 무섭지 귀신 따위는 전혀 꺼려지지 않았다. 만약 나한테도 귀신 따위가 나타난다면 그 간의 사정 이야기를 하고 타협의 여지를 찾겠다는 각오를 했다. 내 상식 속의 한국의 귀신들은 막무가내가 아니라 항상 인간들과 협상의 여지를 남겨 놓기 마련이었으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폐교는 공동묘지 터가 아니라 논이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그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편을 두 번이나 가위 눌리게 한 정체는 정말 심신이 허해져서 나타난 현상일까?
남편의 친구 중에 출가를 해서 불화(佛畵)를 그리는 스님이 된 친구가 있었다. 혹시 어떤 조언이라도 들을까 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스님으로 대했던 시간보다 친구로 지낸 시간이 많아서 평소 그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남편의 겪었던 일을 듣더니 직접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흔쾌히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