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장 백결(柏缺)
벽은 물론 바닥과 천정까지 하얀 회(灰)를 발라 놓은 텅 빈 방이었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조그만 탁자 하나와 마주 놓여진 의자 두 개뿐이었다. 창문이 전혀 없는 것은 이 방에 지하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영목은 자신이 흉한 꼴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안도했다. 비록 자신이 죽인 황임과 같이 죄인임을 명백하게 표시하는 금랑혈(金狼血)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는 자신을 홀대하지 않고 점잖은 곳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문주를 기만한 음모자라는 낙인이 찍혔어도 총타수였다는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대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낮인지 밤인지 모를 그 시각에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순간 그는 갑자기 절망감에 빠졌다. 이 방은 누군가가 '장님의 방'이라고 부른 이후에 모두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이 방에 들어 온 자는 반드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토해내야 하는 곳이었다. 영목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의 생사에 대해 선택을 분명하게 결정해야 했다. 지금이 그의 의지로 결정할 마지막 기회였다.
이 방의 주인은 장님이었다. 그는 마치 유리알 같이 투명한 눈에 점을 찍은 것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 눈은 쉴 새 없이 상하좌우로 움직였는데 한시도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적이 없었다. 영목은 그 눈에 대한 사연을 잘 알고 있었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이 개눈깔이라고 놀려대는 그 눈은 사납기로 유명한 북방의 회색늑대의 눈을 뽑아서 박은 눈이었다.
이 방의 주인은 한 때 살천문에서도 전설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완벽한 살수였다. 단 한번의 실수로 그는 목표물을 놓치고 상대에게 생포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두 눈이 뽑히고, 손가락 열개가 모두 분질러졌다. 온 몸에 아직도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마흔여섯 군데의 상처도 그 때 생긴 것이었다.
운 좋게 상대로부터 도망친 이후로 그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또한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이 되었다.
"총타수를 이곳에 모시게 되어서 송구스럽소. 자결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지금 하시는 게 나을 거요."
이것이 이 방의 주인이 영목을 첫 번째 대면하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날 던진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조그만 탁자에 마주 앉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는 쉴 새 없이 투명한 눈을 굴리며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영목은 선택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실수했다. 그 순간에 자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자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혀를 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결하지 않았고, 그 이후 그는 자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기야 혀를 깨문다 하더라도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장님은 그의 입 전체에 이 방의 벽에 칠한 회를 가득 먹이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멈추게 했을 것이고 실상 그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없을지도 몰랐다.
둘째 날 들어 온 장님이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셔도 되오."
그것이 둘째 날 던진 단 한마디였다. 그는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유리알 같은 눈알을 굴리며 마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영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금랑혈의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자신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죽여야 했던 황임이 왜 입가에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가는 것은 하루 두 끼 가져오는 식사로 알 수 있었다. 사흘이 되는 날 영목은 처음으로 식사를 거부했다.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금랑혈의 고통으로 인해 먹을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때 장님은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는 영목의 머리를 음식에 처박았으며 숨이 막혀 질식하지 않으려면 음식을 씹어 삼켜야했다. 영목은 평소 양보다 두 배나 많이 먹어야 했으며 그것은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나흘째 되던 날 영목은 왜 이 방의 벽에 흰색의 회가 깨끗하게 발라져 있는지 알았다. 사람의 핏자국을 물로 씻어내는 것보다 차라리 그 위에 회를 바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흘째 되는 날부터 뼈저리게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이란 기간은 총타수였고, 이곳 잠형각의 각주인 잠백의 친구였다는 점에서 배려해 준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장님은 사람의 고통이 반드시 육체적인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심리적인 고통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훌륭하게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영목은 이레째 되는 날 피를 토하듯 말했다.
"문주를 불러다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하고 난 뒤에도 반나절 동안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만큼 충분한 고통을 당했다.
"왜…? 무엇을 말하려고…?"
이유는 단지 그 뿐이었다. 고통이란 것이 계속되면 무디어질 만도 한데 장님은 아주 적절하게 그 강약을 조절하여 더 큰 공포를 만들어냈다. 영목은 악을 썼다.
"다… 모두 다…!"
------------
춘삼월이라지만 국경 근처의 북방은 아직도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다만 계절의 변화를 속일 수 없어서인지 얼어붙었던 대지는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행은 잠시 주춤거렸다. 달탄을 향했을 시기는 정월이어서 두꺼운 얼음을 딛고 건넌 강이었다. 사실 강이라고는 하나 비가 많지 않은 황량한 초원을 가로 지르는 강이어서 그 폭은 넓었지만 깊지는 않았다. 선두에 선 호위장(護衛長)은 부장(副將) 두 명을 선두에 세우고 얕은 곳을 골라 도강(渡江)하기로 생각을 굳혔다.
무릎 정도라면 몰라도 허리까지 차는 곳이라면 얼음이 녹아내린 차가운 물에 호위무사들은 물론 사신 일행의 대부분이 물에 발을 담가야 될지 몰랐다. 마차 역시 무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예부시랑은 물론 천관의 상대부까지 있는 마당에 그런 일은 있어서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부교를 띄울 형편은 되지 아니하였다. 이곳을 지나갈 때보다 인원은 물론 마차까지도 두 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달탄에서 바친 공물(貢物)과 공녀(貢女)들이 실려 있는 마차가 늘어 갈 때보다 두 배 이상의 행렬이 된 일행은 속도나 기동력에 있어 훨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바삐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백 여리 정도만 더 가면 그때부터 관속들이 곳곳에서 마중 나올 터이니 제법 위세만 부리고 지나가면 될 것이었다.
아래쪽 길게 돌아 흐르는 곳에 모래가 퇴적되어 넓게 퍼져 흐르기 때문에 기껏해야 무릎정도나 빠지면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 역시 모래가 있다고는 하나 자갈이 섞여있어 그리 깊게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선두에 선 부장은 북방의 지형에 노련한 인물들이어서 순조롭게 일행을 이끌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호위장은 일행의 중간 쪽으로 말을 몰았다. 예부시랑이 탄 마차와 그 바로 뒤 마차에 있는 상대부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마차가 약간 흔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호위장은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갑작스럽게 뒤쪽에 따라오던 마차에서 여자들이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달탄에서 바친 공녀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몸매가 뛰어나고 미모가 출중한 소녀들이라 호위하는 무사들을 단속하기에 바쁠 정도였다.
"무슨 일인가?"
보고를 하다말고 말을 멈추자 마차 안에서 상대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위장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마차에서 내린 공녀 중 몇 명이 그 마차를 호위하던 자신의 수하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목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악, 윽---!"
대답은 비명소리였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었다.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부장 하나가 물 속에서 튀어 나온 새파란 칼날에 목이 달아나고 있었다.
"저… 저것…!"
그리고 주위의 모래 속에서 불쑥 불쑥 칼과 창날이 번뜩이며 튀어나왔다. 자신의 수하들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사실 사신 일행을 노리는 자들은 기껏해야 국경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해대는 비적들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달탄 부족의 힘이 강성해지자 이쪽에 있던 비적들이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더구나 대명의 사신 일행을 노릴 정도로 힘을 갖춘 비적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경계를 소홀히 한 탓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냐니까?"
상대부의 목소리가 뾰쪽하게 올라가며 마차의 창문을 가린 휘장이 걷어졌다. 대답을 하려다 말고 호위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말에서 꼬꾸라지며 거꾸로 처박혔다. 동시에 마차의 창문 틈으로 머리를 내밀려는 상대부의 얼굴로 새하얀 백광이 번뜩이며 쏘아갔다.
"무슨 일이긴…? 네 놈의 목을 따러 왔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