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한길아트
음악을 들으며 <유럽음악축제 순례기> 느낌글을 쓴다.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지은이 박종호가 싫어하는 이어폰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담긴 음악을 듣는다. 이 곳은 서울의 한 대학교 도서관. 그리고 나는 지금 휴가 중. 가 보지 못한 유럽의 고색창연한 페스티벌 현장을 방문한다. 발품이 아니라 ‘눈품’ 팔아가며.
이날 오전까지 천천히 즐겁게 책을 읽었다. 마치 현장에 가 있는 것같이, 친절한 안내를 받으면서. 사람 적은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엎드려 낮잠도 자고 옥상에 올라가 하늘도 보면서 말이다. 이날 따라 하늘은 새하얀 뭉게구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따사로운 햇살 내뿜으며 도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위로한다.
'페스티벌'의 정의부터 알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즌을 마감한 (유럽의) 음악가들이 지금과 같은 휴가 기간에 휴양지에서 벌이는 특별한 음악제가 바로 페스티벌이라고 한다. "음악가들 입장에서는 낮에는 휴가를 즐기고 저녁에는 공연을 한다." 그걸 맛본 후부터 지은이도 "여름이면 무조건 짐을 싼다."
이 책은 12년 동안 그렇게 찾아간 축제의 도시, 공연, 명연주자들, 지휘자들, 프로그램을 자세히 소개하고 그 평까지 덧붙였다. '평'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은 거의 다 '감동 그 자체'다.
지은이가 소개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6개국 18개의 페스티벌은 각각 개성과 분위기와 추구하는 바, 중심이 되는 음악가가 다르다. 예를 들어 독일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바그너를,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 고음악 페스티벌은 고음악을, 체코의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은 체코 음악을 중심 모토로 삼는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더 설렌다.
책 속의 많은 풍경 사진은 아주 고마운 덤이다. 축제 현장뿐 아니라 축제를 축제답게 하는 도시와 마을, 자연의 풍경을 정성껏 실었다. 그저 걸어간 대로 흘러간 시간대로 적어놓은 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지은이가 서두르면 같이 서두르고, 멈추면 같이 멈추고, 감동하면 같이 감동하고...지은이의 감동은 그 풍경에도 상당히 빚을 지고 있다.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모범을 나는 지은이 박종호에게서 발견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과 관련해서 그 부문에서만 일가견을 발휘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세상을 행복해 하며 찾아가고 그렇게 해서 부업과 취미 삼아 하던 것이 직업 못지않은 열성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이런 활동은 주관적 감상보다는, 객관적 사실 정리라는 좀더 발 빠른 행동과 정확한 취재를 요한다. 그에겐 공연 일정 정리와 장소 탐방 자체가 기꺼운 일이 되놔서, 현장에서의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뭐라고 할까. 한가할 틈이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니아 수준을 넘어서서 전문가 수준까지 오른 지은이의 열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연뿐 아니라 뒷풍경에 나는 눈이 잘 돌아간다. 오스트리아 서쪽 국경에 위치한 보덴 호숫가에 설치된 무대에서 벌어지는 브레겐츠 페스티벌 공연의 예가 그렇다. 15분 거리의 열차를 타고 보덴 호숫가 내의 ‘독일 령’ 린다우 섬에 가서 차 마시고 산책하고서 숙소가 있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내게 황홀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지은이 박종호의 반복되는 순례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시를 무작정 물어물어 찾아가기, 없을지도 모를 불안감 속에서 호텔 방 구하기, 반환표라도 없을까 조마조마하며(혹시 그렇게 운에 맡기며 찾아가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닌지) 티켓 구하기, 공연시간까지 공연장과 뒷골목 돌아다니기, 공연 속에 빠져들고 감동하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피로에 지친 몸으로 호텔로 돌아가기, 여유 있는 날 주변 도시 돌아다니기 그리고 다음 페스티벌 장소 알아보기.
박종호의 이런 유람은 말 그대로 순례가 아닐 수 없다. 그건 무거운 트렁크 들고 다니고 기다리고 찾아다니고 아쉬운 소리 하고 난관에 부딪히고 아낌없이 지출하고 그리고 새로운 감동에 무너지고 하는 과정을 무수하게 반복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감동은 새로운 것에 계속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면서 알맹이를 채워가는 것 같다. 페스티벌 주변의 아무도 박종호가 책을 쓰고, 음악 감상실과 음반 전문 매장을 운영하는 내공 깊은 동양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지은이는 그것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발견한 또 하나의 기쁨. 취미 향유(호사)를 매번 반복하다 보면 자기만의 표현방식이 저절로 생겨나오게 된다. 또는 표현문구가 만들어진다. 그런 곳이 나오면 밑줄이 그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아무 건물이나 2층 방을 세내어도 공부가 잘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야말로 직업관객이 되어야 한다.”,
“그(전직 스위스 대통령)가 극장(취리히의 오페라 하우스) 일을 맡아보면서 그의 질병(루프스)도 저절로 다 나아버렸다. 정치를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오페라를 만들면서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것(현의 풍부한 음향)은 내 머릿속에 또다시 호수를 만들었다.”
“철새들도 음악을 듣는지, 호수에는 새 한 마리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음악은, 가로줄 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에게 세로줄로 나타나 그 속도를 늦추어 주고 다른 가로줄로도 건너갈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같다. 건너간 가로줄은 휘어져 있기도 하고 원래의 것과 한참 멀리 벗어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가까워지기도 하는 여러 개의 줄이다.
음악을 알면 다른 사람을 아는 것도 다른 세상을 아는 것도 되지만 자신의 속을 아는 것도 된다. 곡을 작곡하거나 연주하거나 감상하거나 페스티벌을 순례하거나 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를 알아가거나 자신의 속을 깊이 파헤치거나 하는 작업을 교대로, 또는 견주어가며 또는 외로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 빠진 것이 있다. 이 모든 것 속에 가장 크게 존재하는 것 그것은 이 모두가 '즐김'이라는 것이다. '기꺼움'이라는 것이다. 강박이 예술가들에게 자극제가 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가지고는 견고해질 수도 오래갈 수도 없다. 오로지 '즐김'과 '기꺼움'이 이 긴 여정의 가장 큰 힘이 된다고 믿는다
월간 <객석> 8월호에서 읽은, 서미경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말, "음악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 될 수 있습니다" 페스티벌의 그 모든 음악가들이 이런 사람들이고 또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찾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꼭 여유있는 이들의 호사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의 부지런한 발품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이런 페스티벌의 존재를 알고서 유럽 사람들이 여름의 한두 달을 휴가로 보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아직까지 문외한에 가깝다. 그래도 이번 독서를 계기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비중을 더해갈 것 같다. 책을 다 읽은 그날 저녁, 나는 장한나의 귀국 연주회 티켓을 구하려고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벌써 c석은 매진되었고 b석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얼른 회원 가입하고 티켓을 예약했다. 그렇게 아주 쉽게 이 책에 전염되었다.
프랑스의 고성(古城)을 유람하고 책을 펴낸 김화영 교수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과 같이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유람하는 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다. 그걸 통해 그 한 가지를 깊게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와 연관된 많은 것이 그 주제에 녹아 있고 연결되어 있고 공존하기 때문에 심심한 일도 아니다.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것 그것이 문화를 사랑하는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일종의 순례라 할 수 있다.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
박종호 지음,
시공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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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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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들도 음악을 듣는지 호수에는 새 한마리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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