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전 앞의 위치가 뒤바뀌어진 청동봉황과 용조각김정은
이화원 안 동궁문(東宮門)을 들어가면 먼저 숨가빴던 청말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인수전(仁壽殿)이 보인다. 이곳은 서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황제 광서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곳으로 가장 먼저 문 앞에 서 있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과 용 조각이 눈에 띈다.
보통 궁궐이라면 대부분 문 쪽에 왕을 상징하는 용을, 그 옆에 왕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놓기 마련인데 이곳 이화원 그중에서도 정무를 보살피던 인수전 앞에 그 위치가 뒤바꿔져 버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바로 이곳을 오는 관료들이나 사신들에게 청나라의 실권자는 '왕이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서태후의 과시욕이 아니었을까?
서태후와 세 황제
서태후는 중국역사상 중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이다. 비록 측천무후처럼 칭왕은 하지 못했지만 실제 그녀가 죽고 그녀의 손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황제(부의)가 옹립된 지 3년만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때까지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역사 속에 언제나 화려하게 앞머리를 장식한 이름 석자는 늘 서태후였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녀도 자금성 안 궁녀로서의 첫출발은 매우 보잘 것 없었다.
그녀의 출신 또한 만주족 귀족가문인지 산서성의 한족가문인지 논란이 분분하지만 17살 때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간 그녀는 뛰어난 가무솜씨로 함풍황제의 눈에 띄어 그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황제를 낳아 황후 다음의 자리인 황귀비로 신분이 상승되지만 그녀의 권력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 침략으로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도망갔다가 병사한 함풍황제의 뒤를 이어 6살인 그녀의 아들이 동치황제에 오르게 되니 그녀는 왕의 생모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다.
그러나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 권력의 생리라 아들이 17살이 되어 결혼까지 해서 친정을 해야 함에도 권력을 놓지 않고 함께 수렴청정해오던 황후를 독살하고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갈라놓으며 아들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니 홧김에 야행을 전전하던 동치황제는 매독이 걸려 후사도 없이 짧은 생을 마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는 친아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친정조카를 광서황제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굳히는 탄탄대로에 오를 수 있었다.
전리품과 같은 권력다툼
생모와의 권력다툼에서 실패한 동치황제의 죽음을 보면서 또 한번 생각나는 사람이 진시황제이다.
그 또한 처음에는 생모인 무희와 실질적인 친부인 여불위의 섭정으로 왕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왕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그의 행보는 친모인 무희를 음란하다고 별궁에 유폐시키는가 하면 친부인 여불위를 파면하고 사천지방으로 추방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끔 함으로써 통일 진나라의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다툼이란 혈연관계도 무시하는 패륜적이고도 잔혹한 싸움이며 과정은 생략하고 이긴 자의 결과만을 챙기는 전리품과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