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 싱싱하게 살아서 펄떡이다

[2005 민족문학작가대회 참가기 5]

등록 2005.08.08 16:34수정 2005.08.0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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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려호텔에서 바라본 평양의 아침

고려호텔에서 바라본 평양의 아침 ⓒ 박도

서로 미워하지 말자

지난 삶의 대부분을 반공 이데올로기 세상에 살았던 사람이 공산주의 본 고장인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마주치며 만찬을 나눈다는 것은 천지개벽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동안 평화통일을 주장해도, 북녘의 동포를 만나기만 해도 죄가 되었던, 북녘을 향해 사진만 찍어도 사상을 의심받았던 냉전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감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 북녘에도 같은 겨레가 살고 있는데 단지 우리와 다른 체제로 살고 있을 뿐이란 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님이요, 루이제 린저요, 황석영 작가였다. 내가 북녘의 내 조국을 처음 본 것은 1969년 여름, 광주보병학교를 수료하고 전방부대에 배치되어 보충 실무교육을 받았던 기간으로 철책선에 견학 갔을 때였다.

그때 국토를 가로지른 철책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과 산허리에 쓰인 구호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곧 부대 배치 뒤 고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북녘에도 남녘과 다름없이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 같은 단군 후손인 젊은이들 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였던가.

'그래,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도움)은 못할지언정, 동병상증(同病相憎,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미워함)은 하지 말자'고, 나는 이날 이때까지 괴상한 말로 북녘 내 동포를 헐뜯는지는 않았다. 못난이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 서로 상대를 못난이로 욕하는 게 얼마나 바보스럽고 정말 못난이들의 짓인가.

서로 다른 외제의 총을 가지고 동족에게 총질하는 것은 고약한 선생이 두 학생에게 서로 뺨을 때리는 벌을 줄 때 서로 상대에게 코피 터지게 주먹질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은 그저 만나야 한다"


a 만찬장의 청소년 접대원들

만찬장의 청소년 접대원들 ⓒ 박도

만찬장에 들어서자 검은 바지에 흰 웃옷 차림으로 검은 나비타이를 맨 청소년접대원들이 내 눈에 가장 먼저 빨려들었다. 마치 내가 지난 30여 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난 양, 나는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서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껴안아주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이들과 내 아들 조카 제자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일은 나라를 둘로 나눈 강대국도 나쁘지만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선생은 뜨거운 분이야요."
"그래요?"
"조금 전 악수를 나눌 때도 느꼈어요. 손이 무척 따뜻했시요. 하긴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만 글을 쓸 수 있갔지요."

심기섭 안내원이 건배를 제의하면서 건넨 말이었다.

23시 30분, 만찬회가 끝났다.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은 더 늦었다. 밖을 나오자 언저리가 어두웠다. 가로등불도 드물었고 고층건물에도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서울과 같은 울긋불긋한 네온이나 화려한 조명은 없었다. 전력난이 몹시 심하나 보다. 버스도 사람이 타야만 그제야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었다.

"어려워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어요. 조금만 더 나아졌으면 좋갔어요."

옆 자리에 앉은 심 안내원의 말이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이가 인사를 청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으로 시를 쓰는 박철이라고 했다. 내가 남녘에도 박철이란 시인이 있다고 하자 그도 이름을 들어봤다고 말하면서 "사람은 그저 만나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작가들이라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a 고려호텔 앞 창광거리의 아침

고려호텔 앞 창광거리의 아침 ⓒ 박도

정감이 넘치는 '나루터 상점'

2005년 7월 21일

6시30분, 아침 밥 시간이 남아서 카메라를 들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호텔 종업원이 멀리는 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호텔 앞에서 지나는 이를 붙잡고 말도 걸어보고 사진도 찍었다.

a 등교길의 학생들

등교길의 학생들 ⓒ 박도

대부분 학교로 가는 학생이거나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남녀 학생들은 목에가 붉은 머플러를 둘렀다. 어린이를 데리고 가는 이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려고 간다면서 자기는 창광 옷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차도에는 차들이 뜸한 데도 사람들은 곧장 건너지 않고 지하도를 통해 건너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중국 연길은 차와 사람 자전거 등이 한데 뒤엉켜 무질서한 데도 평양의 아침거리는 차분하면서도 질서가 있었다.

7시, 2층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들었다. 자유(뷔페)식인데 주로 남새반찬으로 녹두죽, 팥죽, 흰 죽을 마련해 두었다.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등 여러 가지 남새 반찬을 접시에 담고는 녹두죽과 계란부침을 가져다가 먹었다. 실내에는 <도라지>, <군밤타령> 등 민요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a 평양거리의 교통안전 복무원들

평양거리의 교통안전 복무원들 ⓒ 박도

09:00, 오늘 일정은 평양시내 관람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심기섭 안내원이 내 옆자리로 왔다. 나는 차창밖에 펼쳐지는 풍물들을 보면서 말을 처음배우는 어린이마냥 그에게 일일이 물었다. 거리에 온통 널브러진 구호들 가운데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었다.

- '선군 령도'란 말이 무엇입니까?
"그건 말입니다. 군을 국가발전의 핵심으로 앞장 세워서 군에서 발의한 수령님을 결사 옹위하면서 온 나라 인민을 무장시키고 삼천리 조국의 안녕을 지켜주며 강성대국으로 이끌어 가는 장군님의 령도를 따르자는 말입니다."

곱씹어보니 '선군 령도(先軍領導)'란, 곧 "군이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말이었다. '결사옹위'란 말은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 바쳐서 지키겠다'는 말로 이해가 되는데 '강계 정신'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강계 정신' 무슨 말입니까?
"강계 정신이란, 자강도 강계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고난의 행군 때에 보여준 정신으로 우리식대로 사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 뒤 심 안내원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는데 그 요지는 남에게 의존치 않는 자립경제로 북녘은 교육기반이 단단하기에 자본과 기술만 있으면 금세 일어난다고 남북경협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였다.

a 쑥섬에서 바라본 대동강, 멀리 보이는 다리가 '양각교'다

쑥섬에서 바라본 대동강, 멀리 보이는 다리가 '양각교'다 ⓒ 박도

만수대 의사당을 지나자 보통문이 나오고 곧 대동강이 펼쳐졌다. 강가의 버드나무가 마냥 휘늘어졌다.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게, 평양은 궁한 가운데도 여유가 엿보이는 전원도시였다.

- 유서 깊은 평양에 왜 기와집같은 우리 전통 집은 없습니까?

"박 선생은 뭘 통 모르는구만요. 조선전쟁(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기가 북조선 천지를 석기시대로 만들었잖소. 겨우 몇 채 남은 건 새조국 건설할 때 헐어버렸시요."

심 안내원이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길게 설명하면서 미군 탓으로 돌렸다.

세계 제1로 자랑하던 류경호텔이 골조공사만 마치고 중단한 채 우중충하게 서 있어서 북한의 경제가 몹시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도로가에 눈에 뜨이는 '나루터 상점', 이 얼마나 정감이 넘치는 이름인가.

더운 국수(온면), 돈자리(계좌), 뒤거두매(뒷마무리), 들어온 말(외래어)… 전직 국어 선생으로 북녘에서 가장 배울 점은 우리말이 여태 싱싱하게 살아서 펄떡이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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