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산을 뚫어 '뚜루내'를 만들고

[모녀,고부의 오지여행3] 머나먼 여정 에서 만난 태백 추전역, 정암사

등록 2005.08.08 18:03수정 2005.08.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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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산을 뚫어 '뚜루내'를 만들고

승부마을을 떠나며 결국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승부역 보수 공사를 위한 철도청 트럭이 앞에서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절박한 상황.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경운기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을 차 두 대가 결국 교행에 성공한다.


승부역을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좀 거하긴 하지만 여행의 마지막 날 점심은 그 유명한 태백의 한우주물럭로 하기로 했다. 태백과 도계의 갈림길, 강물이 산을 뚫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구문소라 했다. 수억 년의 세월을 쌓아온 구문소의 바위들이 도로 공사로 어수선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a 적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여행 온 구문소.5억년전의 지구 역사가 새겨진 바위를 뚫고 강물이 흐르고 있다.

적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여행 온 구문소.5억년전의 지구 역사가 새겨진 바위를 뚫고 강물이 흐르고 있다. ⓒ 이승열

아득한 먼 옛날 적도 부근 해변에 삼엽충을 비롯한 고생물들이 크게 번성했고,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아름다운 퇴적층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이곳 구문소에 이르러 산이 되었다. 바위면에 5억년전의 지구 역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구문소일대의 천변 4km구간은 우리나라 하부고생대의 표준 층서를 보여주는 지질시대별 암상을 비교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5천만년에서 3억년전 사이에 생성되었다고 하는 구문소(求門沼)는 강물이 산을 뚫고 지나간 도강산맥(渡江山脈)이라는 특수한 지형을 갖춘 곳으로 세계에서도 그 유형을 찾기 힘든 기이한 곳이다. 오랜 세월동안 강물이 산을, 바위를 뚫었다.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내’라고도 한다.

태백, 그 멀고도 긴 여정

평균 해발 650m의 고원에 형성된 태백시는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쳐져 1981년 시로 승격되면서 두 읍이 모두 태백산 밑에 있기에 태백시로 명명된 도시이다.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원래의 태백산(백두산)은 제 기능을 잃고 장소를 달리하는 또 다른 태백산이 탄생하여 산 꼭대기에 천제단을 쌓고 옛 풍습대로 하늘에 제사 지내니 그것이 지금의 태백시에 있는 태백산인 것이다. 여름철 평균 기온이 18℃로 도로 곳곳에 ‘모기 없는 태백, 열대야 없는 태백’이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a 연탄불에 구워먹는 태백 한우 주물럭. 300g애 21,000원. 태백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의 또다른 행복찾기.

연탄불에 구워먹는 태백 한우 주물럭. 300g애 21,000원. 태백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의 또다른 행복찾기. ⓒ 이승열

2003년 겨울 네 시간을 넘게 달려 서울에서 태백에 간 적이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국도 38호선, 내 마음의 지도 중 가장 오지라고 생각한 영월을 지나서도 두 시간쯤 달린 후에야 간신히 태백시가 나타났다. 30분쯤 태백에 머문 뒤 다시 네 시간을 넘게 달린 후 어두워진 겨울 길을 다시 돌아 왔었다.

갑작스런 문상길, 그 황망하고 급한 마음에도 네 시간 넘게 달려서 간 태백에서 잠시 짬을 내 들른 곳이 추전역이었다. 겨울 석양에 비친, 해발 855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태백산 자락의 추전역은 아름다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보니 무엇이든 건설하면 최고의 기록을 갖게 되나,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이란 영예를 죽령터널(4600m)에게 물려줬다.


a 해발 855m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추전역.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 옆에 있다.

해발 855m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추전역.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긴 정암터널 옆에 있다. ⓒ 이승열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기차역이다. 1973년 10월 16일부터 험준한 산맥과 협곡을 따라 부설된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해발 855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이 역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긴 정암터널(4505m)를 옆에 두고 있으며, 이곳의 지명이 예로부터 싸리밭골이라 내려옴에 따라 이를 본 따 추전역이라 이름지었다.”

겨울이 오면, 밤새도록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쌓인 환상선 철길을 따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추전역과 승부역을 다녀오리라. 아직도 가슴에는 환상을 품은 환상선으로 기억하면서, 내가 겨울철 잠시 스쳤던, 세월이 지난 한여름 잠시 스쳤던 철길 위에 머무르리라.

서른 두개의 풍경소리는 내 가슴에서 바람 소리를 내고

검은 빛 어두운 탄광으로 기억되던 고한, 사북은 온통 ‘카드깡, 전당사’란 간판이 거리를 덮은 또 다른 검은 빛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태백선 철길 아래 물이 마른 개울은 물 속에 포함된 광물질로 황토빛으로 변했고 개울 너머 벼랑에 광부들이 떠난 집이 매달려 있었다.

벼랑 위에 매달린 폐가들, 광부들이 묵었던 숙소, 도시 전체를 카드깡과 전당포가 점령해 버린, 여름 땡볕에 치부가 드러난 거리의 끝에 만난 함백산 자락의 천년고찰 정암사는 지나온 풍경들과 대비되며 더욱 정갈하고 적막했다. 한여름 시간이 멈춘 채 나른함에 빠진 고한은 카지노의 밤 네온 불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a 정암사 적멸궁. 단정하게 수마노탑 아래 서 있다. 절간이 아닌 선비의 사랑채에 들어선듯하다.

정암사 적멸궁. 단정하게 수마노탑 아래 서 있다. 절간이 아닌 선비의 사랑채에 들어선듯하다. ⓒ 이승열


a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푸르른 주목이 되어 천년동안 적멸궁을 지키고 있다.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푸르른 주목이 되어 천년동안 적멸궁을 지키고 있다. ⓒ 이승열

정암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만년에 창건(645년)하고 입적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유학 갔다 돌아오며 부처님의 진신사리(정골·치아·불사리 등)를 들여와 여러 절에 나누어 모셨다고 한다. 이 때 들여온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 등 다섯 곳이다.

a 고사한 나무 껍질 속에서 다시 태어나 푸른 삶을 이어가는 주목. 껍질은 새줄기를 감싸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었다.

고사한 나무 껍질 속에서 다시 태어나 푸른 삶을 이어가는 주목. 껍질은 새줄기를 감싸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되었다. ⓒ 이승열

여느 적멸보궁처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니 당연히 부처는 모시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옮겨올 때 물길을 용이 도왔다 하여 수(殊)자가 붙은 마노석으로 만든 탑 수마노탑 안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범종각 옆 다리를 건너면 자장율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주목이 천년 세월을 견디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주목 뒤로 단아한 지붕의 적멸궁이 자리잡고 있다. 진신사리를 모신 다른 곳이 모두 적멸보궁인데 반해 이곳 정암사는 적멸궁이다.

a 어제 세운듯 정갈한 흰빛의 수마노탑 앞에 부부가 손을 모으고 있다.

어제 세운듯 정갈한 흰빛의 수마노탑 앞에 부부가 손을 모으고 있다. ⓒ 이승열


a 서른 두개의 풍경이 내 마음 속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흩어지고 있었다.

서른 두개의 풍경이 내 마음 속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흩어지고 있었다. ⓒ 이승열

적멸궁 너머 함백산 자락에 진신사리를 모신 수마노탑이 서 있다.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작은 개울은 천연기념물 열목어 서식지이다. 눈의 열 때문에 눈알이 빨간 물고기 열목어, 열을 식히려 맑고 찬 물에만 산다. 회색빛 탄광 끝에서 만난 정암사 개울물이 수마노탑의 흰빛과 더불어 더욱 정갈하고 단정하다.

푸른 이끼로 덮은 고목과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를 지나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천의봉 자락에 수마노탑이 숨어 있지 않더라도 하나의 아름다운 숲 속 산책길이다. 그곳 끝에 모서리마다 풍경소리를 내는 수마노탑이 기다리고 있음에야. 쉬엄쉬엄 수마노탑에 이르니 탑 앞에 앉아 부부가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다. 어떤 간절함이 강원도 깊은 산속 골짜기에 그들을 무릎 꿇게 했을까? 풍경 소리가 한여름 노을 속에서 울리고 있다. 명치끝에 걸린 번뇌 덩어리가 풍경소리에 바람소리를 내며 조각나고 있다.

a 수마노탑 오르는 숲 길 계단에서 만난 정암사 풍경. 탄광의 검은빛과 대비된 맑음이 가득한 곳이다.

수마노탑 오르는 숲 길 계단에서 만난 정암사 풍경. 탄광의 검은빛과 대비된 맑음이 가득한 곳이다. ⓒ 이승열


a 열목어와 나눈 정암사 석간수. 나도 저 물에 열을 식히고 세상과 친하고 싶다.

열목어와 나눈 정암사 석간수. 나도 저 물에 열을 식히고 세상과 친하고 싶다. ⓒ 이승열

덧붙이는 글 | 영양-백암-청송-태백-영월 오지에서 보낸 한여름의 기록입니다.

덧붙이는 글 영양-백암-청송-태백-영월 오지에서 보낸 한여름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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