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으로 새롭게 부활한 진시황

웨난의 <진시황릉>

등록 2005.08.09 06:41수정 2005.08.0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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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입담꾼 웨난의 중국 역사시리즈

a <진시황릉>책표지

<진시황릉>책표지 ⓒ 일빛

자칫 지루하고 딱딱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 내는 작자 웨난의 역사시리즈를 접하게 되면 우선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입담에 감탄하게 된다.


이미 국내에서 소개된 두편의 저서를 통해 피서산장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청나라 역사를 흥미롭게 버무려놓는가 하면, 북경의 명 십삼릉 발굴 보고서를 토대로 명나라와 근대 중국사를 아우르는 신선한 발상을 통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 그의 글솜씨는 이제 청나라와 명나라를 훌쩍 건너 뛰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로 향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일컫는 진시황 병마용의 출토과정을 중심으로 세간에 잘못 알려진 통일왕조 진나라와 진시황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웨난의 새로운 역사이야기이다.

진시황 병마용(진용)이라고 하면 지난 2003년 KOEX에서 열렸던 전시회‘미공개 유물 특별전, 진시황' 에서 처음 만나본 적이 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같이 생생한 느낌을 주는 크기의 토용과 청동마차를 끌고 있는 청동말의 역동적인 모습은 2200년 전의 조각기법이라고 믿겨지기 힘들 정도로 감탄을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귀중한 조상의 보물들을 보따리 장사하듯이 전세계 오라는 곳이면 아무곳이나 풀어놓고 입장료 수입을 벌어들이는 중국정부의 의중이 영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병마용을 둘러싼 그네들의 발굴비화는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소개되는 진시황 병마용 발굴비화

이야기는 1974년 봄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여산 자락에 서양촌이란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 공동우물을 파려 했지만 파내려간 땅 속에서 기다리는 수맥은 나오지 않고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간 사람 모양의 도기인형들만 대다수 출토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 파편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귀중한 유물이란 걸 알 지 못했던 사람들이 도기인형들은 채소밭의 허수아비 용도 내지는 놀잇감 등으로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었고 함께 발견된 쇠뇌와 화살촉과 같은 청동유물은 14원40전을 받고 폐품회수처에 팔려간 신세가 되어버린 발굴 당시의 이야기, 이 소문을 듣고 달려온 임동현 문화관 관장인 왕진성이 이 도용들을 진용으로 확신하였지만 당시 상부에 알리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복원작업을 실시하게 된 이유가 바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4인방(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이 주도하던 비림비공(批林批孔:반모택동 세력 제거를 위해 일으킨 임표와 공자사상 비판 운동) 때문이었다는 당시 서슬퍼랬던 시대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지역 출신 신화사 통신 기자에 의해 전모가 밝혀져 위로부터 거꾸로 발굴상황을 재확인하게 된 이야기 등 진시황 병마용에 대한 발굴비화들이 웨난의 입담을 빌려 자세하고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진시황의 실체와 몇 가지 오해


그러나 발굴비화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입담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진시황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를 희대의 폭군으로 내몬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에 대한 오해, 오히려 순장을 대신해 병마용을 만들게 된 진시황제의 인간 존중 사상, 뛰어난 전략가이자 실용주의자였던 진시황의 실체에 관하여 사료를 통해 되살려낸 작가의 상상력은 당시 병마용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의 수준을 근거로 과학적으로 펼쳐져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막강했던 대 제국 진나라가 진시황 죽음과 함께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걸까? 이에 대한 의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진시황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노역과 지나치게 긴 병역 때문에 백성들이 반발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중략)

만일 호해가 왕위를 계승한 뒤 힘써 정치를 하고 사회모순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면 그렇게 빨리 진나라가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정내부 관료집단의 단결과 이익을 보호했다면 설사 봉기가 일어났다 해도 이를 막아낼 충분한 역량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진나라 장수 장한이 몇 십만의 노역자를 무장시켰다면 습격해오는 주장의 농민 봉기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방에서 방어중인 진왕조의 30만 정예병과 대장군 몽념이 장한과 병사를 합쳐 공동으로 적에 대응했다면 유방이나 항우의 대군도 함곡관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이하 생략)"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갑자기 역사속으로 사라진 진나라 멸망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있지만 그 원인이 되기에는 약한 감이 있다. 저자 또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역사는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진나라가 급속히 패망했다는 사실 뿐이다. 모든 가설은 역사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과거를 뛰어넘어 지금 낙후된 병마용의 발굴기술과 관리과정에 대한 문제점 또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파편조각이 된 도용들의 인공복원을 위해 사용된 화학접착제의 문제점, 병마용얼굴 채색의 변질과 온도로 인한 병마용의 부식 문제 등을 막을 시급한 대책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라는 작은 왕국에서 13살인 어린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오른 후 23세에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친아버지 여불위를 파면하고 사천지방으로 유배시킴으로써 대제국 진나라의 기초를 세우고자 한 냉혹한 진시황이었지만 이 책에서 묘사한 진시황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처럼 아방궁 속에서 주색에 빠져 영원히 살기 위한 불사약을 찾는 진시황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상으로 진시황과 병마용에 대한 그의 입담은 기세좋게 끝이 난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가 표현해낸 생각이 진실이든 상상이든 역사 시계는 땅 속에서 되살아난 2200여년전 진나라 유물들의 현실은 역사에 대해 어떠한 상상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화학접착제로 붙여진 병마용들이 전세계 이곳 저곳의 도시를 떠돌며 그 옛날의 영화를 재현하고 달러벌이를 할 뿐이다.

그러기에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과거 진시황과 진나라의 영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같은 외국인에게 있어서 좀 과장되고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진시황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준 점에서는 서안의 병마용 박물관에서 안내원이 했다는 말처럼 다시 한번 생각해볼 만한 여력은 충분한 책이다.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시황은 결코 대다수 황제처럼 주색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는 힘껏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고 이 중화제국이 영원히 강대해져 쇠락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바람에서 그는 대담하게 신기하고 허황된 영단과 묘약, 곧 상생불사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진시황릉> 웨난지음/유소영 옮김/일빛출판사/ 12,000원

덧붙이는 글 <진시황릉> 웨난지음/유소영 옮김/일빛출판사/ 12,000원

진시황릉 - 중국 고대사의 불가사의

웨난 지음, 유소영 옮김,
일빛,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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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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