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들어가는데 돈을 내라니...

[산티아고 일기 8] 오늘날 교회와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

등록 2005.08.09 19:04수정 2005.08.1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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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 대성당 앞 광장. 지친 몸을 쉬고 있는 순례자 조각이 인상적이다.
부르고스 대성당 앞 광장. 지친 몸을 쉬고 있는 순례자 조각이 인상적이다.김남희

어느집 담벼락에 붙은 순례자의 그림 앞에서 닐스크리스티안과 쥬느비에브가 지친 순례자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다.
어느집 담벼락에 붙은 순례자의 그림 앞에서 닐스크리스티안과 쥬느비에브가 지친 순례자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다.김남희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발레리

바람이 분다.
다시 걸어봐야겠다.


김남희


2005년 7월 8일 금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장 본 비용 4.95 + 숙박 3 = 7.95 유로
오늘 걸은 길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 벨로라도
(Belorado) 22.5 킬로미터


오늘도 눈을 뜨니 5시. 더 자고 싶어도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알람소리로 인해 더 잘 수도 없다. 아침잠 많은 내가 스페인까지 와서 새벽마다 일어나느라 고생이다. 크림 수프 끓여서 쥬느비에브와 나눠 먹고 숙소를 나선다.

날은 오늘도 흐리다. 걷기에 좋은 날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걷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한다. 한 시간 반 후 그라뇬(Granon)을 지나 다시 한 시간 후 레디실라(Redisila) 통과.

배고프다고 중얼거리는 나를 위해 쥬느비에브가 언덕에서 점심을 먹고 가자며 이끈다. 그녀가 싸온 빵에 치즈와 참치를 얹어서 먹고, 요구르트에 복숭아를 잘라 넣은 후식까지 먹고 나니 든든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쥬느비에브가 물집 난 내 발을 치료해주겠다며 무릎에 올려놓는다. 알코올로 소독하고, 바늘로 따서 물을 빼낸 후 밴드를 붙여준다. 너무나 정성껏 꼼꼼하게 치료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예쁘고 고맙다. 왼쪽 엄지발톱이 빠지려는지 색깔이 검게 변하고 있다. 불쌍한 내 발들.

쥬느비에브가 발가락의 물집을 치료해 준 기념으로 찍은 발.
쥬느비에브가 발가락의 물집을 치료해 준 기념으로 찍은 발.김남희
서늘한 바람 부는 언덕에서 푹 쉬고 난 후 다시 걷는다. 나비들이 내 주변을 날아다닌다. 살그머니 말을 걸어본다.


"나비들아, 이리 와서 내 어깨에도 앉으렴. 난 꽃은 아니지만 가끔은 꽃처럼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사람이란다."

그 사이 구름 사이에서 해가 나와 세상이 환하다. 미루나무를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가 귓가에 찰랑인다.

1시. 오늘의 목적지인 벨로라도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여기 호스피탈레도(Hospitalero : 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로 대부분 스페인 혹은 유럽인들이다. 카미노 산티아고를 걸은 사람만이 자원봉사자가 될 수 있다.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몇 십 년까지 하기도 한다)는 스코틀랜드 할머니다.

한국인이 어떻게 알고 이 길을 걷느냐며 무척 신기해 하는 바바라 할머니. 나중에 스코틀랜드도 걸어서 여행할 거라고 했더니 할머니 집에 와서 머물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신다.

짐 풀고, 씻고, 빨래하고, 슈퍼에서 빵 사와서 간단히 점심 먹고, 두 시간이나 잤다. 눈을 뜨니 5시.

숙소 바로 옆 성당에서 열리는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바바라 할머니, 쥬느비에브, 로만과 함께. 이 넓은 교회당의 10분의 1이나 찼을까. 정장을 차려 입은 마을의 노인들, 몇몇 순례자들이 전부이다. 미사를 이끄는 신부님들의 모습도 기운이 없어 형식적으로 느껴진다.

온타나스 마을의 교회와 알베르게.
온타나스 마을의 교회와 알베르게.김남희
오늘날의 교회와 종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사람들의 삶과 유리되어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만 종교는 어떻게 해야 삶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 스페인의 모든 마을마다 교회의 위치는 이렇게 중심에 있음에도 그 영적 위치는 삶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이태리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온 마리아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종교는 내 삶의 가이드 라인이야."
"내 삶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건 신도, 부모도, 학교도 아니라 나 자신이야. 그것도 길고 오랜 고통과 시행착오의 세월을 거쳐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종교가 삶의 가이드라인이 되지 못하는 시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과 '평화'라고 인사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내가 미사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평화를 비는 그 순간, 이미 내 마음속에는 평화가 가득 차오른다.



2005년 7월 9일 토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숙박 5 + 아이스크림 1.4 = 6.4 유로
오늘 걸은 길 : 벨로라도(Belorado) - 오르테가(Ortega) 25킬로미터


5시에 일어나 버터 바른 바게트와 뜨거운 차로 아침을 먹었다. 6시 출발.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닐스크리스티안, 쥬느비에브, 마흐진느.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닐스크리스티안, 쥬느비에브, 마흐진느.김남희
쥬느비에브에게는 "천천히 갈 테니 따라와"라고 말하고 빨리 걷는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새벽 공기 속에서 침묵하며 혼자 걷고 싶다. 어두운 미명의 거리를 혼자 걷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누리고 싶으니까.

7시. 토산토스(Tosantos)에서 잠시 휴식.
7시 45분. 에스피노사(Espinosa) 도착. 마을 입구에서 늙은 수녀님이 성모 마리아 목걸이를 순례자들에게 나눠주고 계셨다. 나도 받아서 가방에 매달았다.
8시 30분. 빌라프랑카(Villafranca) 도착.

두 시간 반 만에 12km를 걸었다. 왜 이렇게 기쁜 거지? 속도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기쁜 건 다름 아닌 다리가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기 때문이다. 오른쪽 무릎의 통증이 어느새 사라졌다.

잠시 멈춰 서서 간식 먹는 사이에 쥬느비에브 합류. 여기서부터는 오르막이자 숲길이다. 어제까지 노란 밀밭만 보다가 오늘 초록 숲을 보니 내 기분도 싱그러워진다. 걷는 길에 숲이 나오면 숨이 깊어지고 편안해진다.

10시 30분, 솔밭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30분 쉰 후에 다시 걷는다. 계속되는 숲과 초록의 물결.

12시 오늘의 목적지인 오르테가(Ortega)에 들어섰다. 슈퍼도 없는 정말 작은 마을이다. 마을에는 오직 작은 바가 하나 있을 뿐. 알베르게엔 부엌도 없고, 뜨거운 물도 몇 명 못 가서 끊기는 바람에 늦게 온 사람들은 찬 물에 몸을 씻어야 했다.

마을의 빨래터에서 빨래 중인 순례자들.
마을의 빨래터에서 빨래 중인 순례자들.김남희
빨래를 하기 위해 마을 분수대로 갔다. 쥬느비에브와 빨래를 하고 있자니 마치 동네 공동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것 같다. 빨래하고, 한숨 자고 일어나 동네를 둘러본다. 물집으로 인해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이제 무릎은 거의 정상으로 회복된 것 같은데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물집이 곪고 있어 걱정이다. 한 시도 편할 날 없는 내 발.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아침 3.8 + 간식 2.2. + 숙박 3 + 저녁 6 = 15유로
오늘 걸은 길 : 오르테가(Ortega) - 부르고스(Burgos) 21킬로미터


오늘은 6시 출발이다. 30분 후 아게스(Ages) 마을을 지난다. 마을 입구에 '산티아고까지 518km'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었다.

아테푸에아르카(Atepuearca) 마을의 바에서 크로와상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쥬느비에브와 어제 숙소에서 만난 덴마크 청년 닐스크리스티안과 함께 걷는다.

끝없는 밀밭길 사이로 걸어가는 순례자들.
끝없는 밀밭길 사이로 걸어가는 순례자들.김남희

순례자들의 안내인 역할을 하는 조개껍질 모양의 길 안내 표지.
순례자들의 안내인 역할을 하는 조개껍질 모양의 길 안내 표지.김남희
오늘은 카미노를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 만나는 큰 도시 부르고스(Burgos)에 들어서는 날이다.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서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외곽지대가 너무나 길어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해 인터넷을 쓰니 역시나 한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다운로드 역시 막혀 있어 호스피탈레로에게 부탁하니 한글 IME를 깔아준다. 얼마 만에 인터넷을 하는 건지!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 처음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편함을 열어 가족과 친구들의 편지를 읽는다.

짐을 풀고 나서 바로 닐스크리스티안과 성당으로 갔다. 성당을 들어가는 데 3유로의 입장료를 내야하는데(순례자들은 1유로)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라 무료라고 한다. 교회 앞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좌판을 걷어치웠던 예수님이 돈을 내고 교회에 들어가야 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돈을 내고 둘러보아도 후회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성당이라는 닐스크리스티안의 설명이 이해가 된다.

성당을 나오니 낯이 익은 몇몇 순례자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멕시코에서 온 알렉스가 가방을 잃어버렸단다. 성당 앞에 가방을 세워두고 성당을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 가방을 들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마을에서도 늘 이런 식으로 둘러보고는 했지만 아무 일이 없었는데 여긴 대도시답게 바로 사고가 생겼다. 순례자들이 그를 돕겠다고 이리저리 가방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이미 작정하고 들고 간 가방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결국 가방을 찾지 못한 알렉스는 여권을 발급받으러 바르셀로나로 가야한다고 한다. 걷기 위해 멕시코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일을 당하니 얼마나 기분이 우울할까 싶어 내 마음이 다 미안하다.

성당을 나와 강변의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걸었다. 뜨겁던 햇살이 저물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 되니 거리에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광장에서 악단이 쿠바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자연스레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춘다.

손을 꼭 맞잡고 춤을 추는 노부부를 시작으로 젊은 연인들, 아이들까지 뛰어 들어 어느새 흥겨운 춤판이 벌어진다.

"이게 바로 내가 스페인을 사랑하는 이유야. 이들은 삶을 즐길 줄 안다니까!"
"맞아. 덴마크에서라면 사람들은 이렇게 나와서 춤을 추지 못하지."
"이렇게 도시의 광장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자니 순례자가 아니라 관광객이 된 기분인데!"
"알베르게의 귀가시간 제한만 없다면 완벽할 텐데!"

강변의 카페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문 닫는 시간 10분 전이다. 어느새 사람들은 잠에 빠져들어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방을 가득 울리고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의 조각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의 조각김남희
성에서 내려다보는 부르고스 시내와 대성당
성에서 내려다보는 부르고스 시내와 대성당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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